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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와 늘은 개-늙은 개와 여행하는 방법

나나수키 2018. 4. 1. 14:01
아기와 늙은 개


 늙은 개와 여행하는 방법

매일이 작은 여행

by 목요일 다섯시 Mar 15. 2018


딱히 바다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모래가 발바닥에 껴서 별로예요.


강아지였을 때는

바다에 첨벙 들어갔어요.

모래밭에서 우다다다 뛰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제는 별로예요.


나는 이미 다 해봤으니까요.

이제는 아기 차례예요.


나는 그냥 여기에 앉아서

바다를 보고 아기를 볼게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거든요.


참,

나도 여기에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개가 아주 작았을 때, 여행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방에 강아지를 쏙 넣어 가면 그만이었다. 개는 가방 안에 들어앉아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탔다. 작은 구멍 사이로 세상을 구경했다. 개는 승차 요금을 따로 내지 않았다. 공짜로 어디든 할랑할랑 마실을 다녔다. 작다는 건 확실히 실용적이다.


개는 나이와 함께 몸집도 커졌다. 나풀거렸던 몸이 이제는 8kg을 넘어섰다. 몸이 쏙 들어가던 개 가방은 누구에게 준 지 이미 오래다. 그래도 개와 함께 여행을 가려면 가방이 꼭 필요하기에 우리는 가장 큰 사이즈의 가방을 새로 샀다. 새 가방에 개의 엉덩이부터 겨우 쑤셔 넣어 지퍼를 닫았다. 개는 떠나기도 전에 지쳤다.


우리의 목적지는 강릉. 차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6시간 30분을 달려 강릉에 도착했다. 명절도 아닌, 평일 한가한 낮시간에 출발했는데도 그랬다. 늙은 개는 답답한 것을 참지 못했다. 휴게소마다 차를 멈추어 개에게 바람을 쐬어주었다. 우리는 덕분에 지역별 휴게소 음식을 배 터지게 먹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떠나왔건만, 초저녁이 되어서야 강원도에 도착했다. 늙은 개와 여행하기 위해서는 내비게이션에 최단거리 노선이 아니라, 인내심부터 장착해야 했다.




전날 밤, 우리는 숙소를 정하면서부터 욕심을 내려놓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호텔이나 리조트의 꿈은 접어야 한다. 고이고이 접어 최대한 멀리 보내야 한다. 간혹 개 출입이 가능한 펜션이 있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우리는 에어앤비를 이용했다. 대부분의 숙소가 <반려견에 적합하지 않음>이라는 이용규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개와 여행한 지 13년 차. 어느 숙소에나 빈틈은 있는 법이고 우리에겐 '사바사바'라는 어른의 기술이 있다. 의외로 간단하게 숙소를 정했다. 에어앤비 호스트는 되도록 집에 개 냄새가 배지만 않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냄새 제거제, 일명 '칙칙이'를 챙겼다.


바닷가로 여행을 간다면 누구나 한 번쯤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꿈꾼다. 창문을 열면 눈 앞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 이른바 '씨 뷰'를 원한다. 우리 숙소는 '논 뷰'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바다가 아닌 드넓은 논밭이 보였다. 바다든 논이든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니 그저 감지덕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행의 꽃, <조식 서비스>는 집에서 챙겨온 햇반과 마른반찬으로 셀프서비스했다. 밥을 먹고서는 숙소 주변을 걸었다. 우리는 밭 사이사이에 난 농로를 걸었다. 개와 함께 걸으니 여기가 우리 동네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절대 잊지 못할 여행이다. 늙은 개와 여행할 때에는 <꿈은 크게, 마음은 넓게>가 아닌 <되도록 꿈은 작게, 마음은 넓게>라는 마음만 가져가면 된다. 그러면 여행이 풍족해진다.


그러나 여행에서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맛집 투어'이다. 여행은 자고로 먹기 위해 가는 일이 아닌가? 아니다. 여행지에서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흔하지 않다. 동네 단골 밥집이라면 모를까, 여행지에서는 더욱 드물다. 개를 잠시 차에 두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푹푹 찌는 한여름이나 찬 겨울에는 그럴 수도 없다. 맛집은 포기하고 대충 만만한 곳에서 테이크 아웃을 한다. 저녁에 먹을 닭강정과 회를 싸들고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베란다에 돗자리를 깔고, 논을 보며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개도 우리 곁에서 사료를 까드득 까드득 먹어치웠다. 열린 창문 사이로 멀리에서 옴직한 바다 냄새가 났다.






날이 푹푹해졌다. 긴 겨울 탓에 잔뜩 옹크렸던 마음이 순두부 풀어지듯 듬성듬성해졌다. 어디선가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어디로든 가보자며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끌고간다. 그래, 여행을 떠나자. 신이 나서 비행기 티켓을 알아본다. 4월의 제주도가 좋을까. 아니면 한 번도 못 가본 남해엘 가볼까. 달뜬 기분에 벌써부터 얼굴이 붉어진다. 옆에서 자고 있던 늙은 개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개가 눈빛으로 말한다.


나는 비행기 못 탄다.



여행지로 흘러갈 뻔했던 마음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개는 우리 가계 경제에 큰 도움을 주는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이 일을 열 번, 스무 번쯤 하다 보면 우리는 여행의 고단함을 잊고 또 짐을 쌀지도 모른다. 쉽게 떠날 수 없는 여행이라 더욱 간절하다.





별 수 없이 아기와 개를 데리고 집 근처를 걷는다. 바다도, 맛집도 없는 동네의 한적한 이 길이 아이들은 그렇게도 좋은가 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 사이를 걷는다. 아기는 몇 걸음 걷다가 길가에 고개를 박고 소리를 지른다. 동네 오빠가 떨어뜨린 비비탄 총알이다. 조금 걷다가 또 멈춘다. 누가 먹다 버린 사탕 봉지다. 아이는 그런 것들을 찾으면 보물이라도 주운 듯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산책이 끝나면 주머니가 불룩해져서 돌아온다.


아기는 자꾸만 나뭇잎이 분홍색으로 변했다고 난리다. 개도 말없이 여기저기 영역 표시를 하기에 바쁘다. 매일 걷는 이 길에서 새로운 침입자의 냄새라도 맡은 건지 부산스럽게 코를 벌름거린다. 아이들의 호들갑에는 전염성이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겨우내 빳빳했던 나뭇잎이 어쩐지 조금 통통해 보인다. 바싹 말랐붙었던 공기가 느슨해짐을 느낀다. 앞서가던 아이들의 정수리가 반짝거린다. 내리쬐는 햇볕에 봄기운이 숭얼숭얼 달려있다.


주머니에 넣어온 기념품이 비비탄 총알이면 어떤가. 아기에게는 바다에서 주워온 예쁜 조개껍데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두둑해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그만이다. 매일이 작은 여행이다.




              


아기와 늙은 개 [키우고, 기르다] thursday5pm@naver.


                
  • SSOVIE 이미지
    SSOVIE Mar 21. 2018

    오늘이 목요일인줄 알고 기다렸는데 수요일이어서 아쉬움에 글남깁니다.
    내일까지가 너무 기네요; 글도 사진도 다 너무 좋아요~ :)

  • 목요일 다섯시 이미지
    목요일 다섯시 Mar 22. 2018

    @SSOVIE 소비에님의 덧글을 읽고 저녁 내내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를 토닥여주는 말 같아서 호랑이 기운이 납니다. 고마운 말씀 정말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