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닦아주는 개
시리얼을 손에 쥐어주는 아기
개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개는 눈물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웃을 일도 울 일도 끓어 넘치게 많았던 20대 초반의 내 곁에 그 개가 있었다. 개는 널뛰는 내 감정에 맞추어 덩달아 바삐 움직였다. 나는 치사하게도 울 때만 개에게 기댔다. 모두가 잠든 밤, 시끌벅쩍한 노래를 틀어놓고 이불 속에서 몰래 울고 있으면 개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눈물을 핥아댔다. 화장실에 숨어서 울기라도 하면 문을 벅벅 긁었다. 개는 악착같이 내 슬픔을 쫓았다. 그때의 나는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눈물은 우리 개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무슨 울 일이 그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눈물이 과했던 시절이었다. 그땐 그랬다. 나는 뭐든지 서툴렀다. 집을 떠나와 타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도, 남들 다 하는 공부를 따라가는 일도, 아득한 미래도 버거웠다. 관계에 지쳐서 울었고 가족이 그리워 울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울기 좋은 날'이라고 정하고, 외출했다가 집에 오자마자 마구 울어버린 날도 있었다. 눈물이 <긴급 땡처리>만큼 값쌌던 때였다. 눈물자국으로 베개 솜이 온통 누렇게 뜰 정도로 밤마다 그 짓을 했다.
개는 그런 나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울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리 개였다. 20대의 평범한 여자애와 유기견 보호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극적으로 입양됐지만 아직도 세상이 낯선 개, 우리 둘 중에서 위로받아 마땅한 자는 내가 아니라 개였다. 개에게는 보호소에서부터 달고 온 진한 눈물 자국이 낙인처럼 박혀있었다. 손수건을 내밀어야 할 사람은 나였다.
내가 우는 시늉이라도 하면, 개는 제 집에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러고서는 방구석에 처박혀 어깨를 들썩이며 혼자만의 슬픔에 빠져있는 미숙한 보호자를 달래주었다. 개는 두 발로 서서 남은 두 발을 내 가슴에 얹었다. 조그만 발바닥이 무척 따뜻했다. 개 발바닥이 청진기가 되어 내 몸 이곳저곳을 지그시 눌렀다. 차갑지 않은 진찰이었다. 말없는 위로였다.
개는 내 얼굴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핥아댔다. 어찌나 정성스럽게 핥는지 나는 이내 민망해졌고, 그 민망함은 한바탕 폭소로 이어지곤 했다. 나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야 할지, 그만 좀 하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웃었다. 그러다 보면 울었던 이유가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개에게는 큰 일을 작게 만들어버리는 신기한 치유 능력이 있었다. 개는 진지하고도 애달픈 표정으로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개는 내 마지막 눈물 한 방울까지 다 핥아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도통 울지를 않는다.
눈물이 금값이 됐다. 아무래도 그때 개가 내 눈물의 씨앗까지 모조리 다 말려버렸나 보다.
작은 방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의 것은 아니고 딸애의 목소리다.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운다. 어제는 뽀로로가 너무 좋다고 해서 만 원이나 주고 영화를 결제해줬는데, 오늘은 그게 무섭다고 펑펑 운다. 어떨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운다. 나는 온종일 딸이 연주하는 눈물의 굿거리장단에 놀아난다. 딸은 내게서 '오늘은 울기 좋은 날' 유전자를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늙은 개가 벌떡 일어난다. 아기가 있는 방으로 가는가 싶더니 제 밥그릇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우는 아기를 뒤로하고 사료를 먹는다. 개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어쩌다 제 앞에서 아기가 넘어져 우는 모습을 봐야지만, 겨우 달려가 아기의 볼을 핥아준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할까 말까 망설였던 '눈물 냄새 탐지능력'도 거의 사라졌다. 고기 냄새는 잘 맡던데 이상하다. 어쩌면 늙은 개는 만사가 귀찮아져서 그 능력을 잃은 척하는지도 모른다.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아침부터 허둥지둥이다. 쩔쩔매는 내 꼴이 영락없이 그 옛날 기를 쓰고 나를 위로했던 개의 모습과도 같다. 나는 어떻게든 아기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개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다만 사람처럼 말을 할 줄도 모르고 어깨를 토닥여 줄 두 손도 없으니, 개는 무작정 다가와 눈물을 날름 먹어치웠다. 나도 딸의 슬픔을 홀라당 없애주면 좋을 텐데. 이제 어쩌나. 눈물 닦아주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됐다.
개가 멍하니 우리를 바라본다. 나와 아기, 그리고 남편이 하하 호호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오도카니 보고 있다. 검정 콩알처럼 까맣던 두 눈에는 희뿌연 안개가 끼어있다. 늙은 개의 눈에 세월의 더께가 가득 들어찼다. 눈도 먹먹한데 귀도 들리지 않으니 가족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예전에는 몇 개의 말을 알아들었는데, 그래서 나름 아는 척도 했었는데, 하고 한숨을 푹 쉰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니 애꿎은 두 눈만 꿈뻑인다. 눈 밑으로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맺힌다. 늙은 개는 요즘 자주 운다. 제가 우는지도 모르고 눈물을 떨군다. 이제 우리가 눈물을 닦아줄 차례이다.
토요일 아침, 모처럼의 휴일에 눈꺼풀이 무겁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아침잠이 많은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부지런한 엄마>를 연기하다가, 토요일이 되면 그 일을 관둔다. 잠이 깼어도 이불 속에서 한참을 미적거린다. 어젯밤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 늦게까지 잠을 못 이뤘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피워본다. 아침잠 없는 딸과 남편, 그리고 개가 부엌에 한데 모여 소란스럽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자박자박 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음조차 나의 눈꺼풀을 걷어내지는 못하고, 나는 다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개가 손바닥을 킁킁거리기는 통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주먹진 손을 가만 펴보니 시리얼 한 알이 쥐어져 있다. 다섯 살 딸애의 짓이다. 평소에 아침밥을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어미가 그 큰일을 치르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 가져다 둔 모양이다.
이불을 걷으며 시리얼을 깨문다. 어젯밤에 끌어안고 잤던 걱정 한 알이 오도독 부서진다. 이부자리를 마저 정리하며 일어서는데 베갯잇이 뽀얗다. 눈물 닦아주던 개는 어느새 노견이 되어 눈물 처리반 팀에서 은퇴했지만, 이제는 나의 아기가 신입 사원으로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해준다. 안방 문을 열고 가족들이 모여있는 부엌으로 나선다. 모두에게 <오늘은 웃기 좋은 날>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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