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당신의 품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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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슨 종이니?
몰라요,
나에게도 엄마 개, 아빠 개가 있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잊었어요.
너무 까마득한 옛날 일이에요.
너는 어디에서 왔니?
몰라요,
강아지 공장일 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당신이 사는 집 근처,
조용한 골목길에서 태어났을 수도 있구요.
그냥,
강아지 별에서 왔다고 해 둘게요.
네, 나는 강아지 별에서 왔어요.
얘는 무슨 품종이에요?
어린 개와 산책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었다. 나는 무심코 "잡종이요."라고 했다. 입 밖으로 잡종이라는 단어가 새어 나오자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냥 <믹스>라고 말할 걸 그랬나 싶었다. 물어온 이는 그러나 말거나 "그렇군요." 하고 제 갈길을 갔다. <믹스>나 <잡종>이나 같은 말인데, 왜 어떤 말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떤 말은 조금 괜찮아 보였던 걸까.
종종 사람들은 나의 개를 보며 "골든리트리버 강아지 맞죠?" 하며 반가워했다. 확실히 어린 개는 이름에 '골드'가 들어간 그 개를 닮은 듯했다. 털 색깔이 얼추 비슷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졸지에 골든리트리버가 된 개는 한참 동안 사람들에게 쓰다듬을 받았다. 내가 개를 <잡종>이라고 했을 때와 <골든리트리버>라고 인정했을 때, 사람들이 개를 대하는 온도 차이가 너무나 분명해서 마음 한 구석이 살짝 데인 듯 쓰렸다.
나는 동물병원엘 가서 수의사에게 개의 품종을 물었다. 수의사는 개를 이곳저곳 살피더니 "말티즈, 코카스파니엘, 그리고 그 외의 잡종이 섞인 것 같네요."라고 했다. 맙소사. 앞으로 품종을 묻는 사람들에게 "얘는 말티즈, 코카스파니엘, 그리고 여러 잡종이 섞인 개예요."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걸까. 그것은 몹시 귀찮은 일이었다. 나는 곧 그 귀찮은 질문을 끊을 수 있는 대답을 생각해냈다.
"유기견이었어서 잘 모르겠네요."
사람들은 잠시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이내 제 갈길을 갔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자기소개를 한다.
대학에 갓 입학하고서 자기소개를 갖는 시간이 있었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자신을 설명했다. 공식처럼 <제 이름은 000이고요, 000에서 살아요.>라고 했다. 게 중에 어떤 아이가 "저는 청담동에서 나고 자랐어요."라고 말하자, 어디선가 '오...' 하는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섬마을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쩐지 초라한 기분에 이름만 서둘러 말하고 자기소개를 끝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향해 터지는 작은 탄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청담동이 어디에 있는 동네인지 전혀 몰랐지만 자기소개 시간 이후, 그 청담동 아이가 모임에서 인기인이 되는 걸 보고서야 대충 그 지역이 부유한 동네라는 걸 알았다. 개에게 품종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출신이 있다는 걸, 갓 스무 살이 되어서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집에서 아기를 키운다. 사람에게 출신이 있다는 건 육아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므로 그런 말들은 다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대학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회가 정한 '결혼 적령기'에서 한참 벗어난 친구였다. 안부를 묻자마자 한탄하며 쏟아내듯 내게 말했다.
요즘에는 소개팅에 나온 남자가
어떤 차를 끄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차 유리창에 붙여있는
아파트 출입증이 중요한거야.
래미*, 아이파* 아파트 출입증이 붙어있으면
일단 반쯤은 성공인 거지.
아, 이제는 출신 동네에서 브랜드 아파트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서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가 도무지 친구를 데려오질 않더란다. 이유를 캐물으니 친구들이 주공아파트에 산다고 놀릴까 봐 그랬단다. 아이도 부모도 쓰렸을 마음을 생각하니 미간이 찡그러졌다. 어른들이 말하는 걸 그대로 보고 들으며 자라는 아이들은 어느새, 부모의 말 그림자까지 닮아버렸다.
"얘는 무슨 종이에요?"
오랜만의 그 질문에 뒤를 돌아봤다. 얼핏 예닐곱 살 되는 아이였다. 내가 습관처럼 해오던 대답을 꺼내려는 순간, 나의 아기가 말을 가로챘다.
"오빠, 종이 뭐야? 얘는 우리 집 개야."
"그거 말고, 개 종류가 뭐냐고."
녀석이 재차 물었다.
"그냥 우리 집 개라고!"
딸애는 바락바락 목청을 높였다.
그랬다. 개는 그냥 우리 집 개였다.
개는 모른다. 그들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견이 어떤 품종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강아지였을 때 어미와 떨어져서 펫샵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이 알 턱이 없다. 그러나 개들에게 그런 건 하나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직 곁에 있는 사람뿐이다.
개가 눈을 반짝이는 데는 따로 있다. 나를 키우는 사람이 몇 시에나 집에 들어올 건지, 오늘 간식 서랍에서는 어떤 간식이 튀어나올지, 산책은 도대체 언제 시켜줄 건지, 반려인의 기분이 어떤지, 슬픈건가, 기쁜 건가, 오늘도 내가 달래줘야하나.
내가 지켜본 개는 그러했다.
당신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당신이 어느 동네에 사는지
나는 잘 몰라요.
다만
당신이 지금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나는 잘 알아요.
세상 그 누구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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