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남은 시간
네가 나이 들어 딱 하나 좋은 이유
개를 씻기려고 물을 튼다.
물줄기에 숨어있던 검은 반점이 수두룩 드러난다.
'언제 이렇게 나이 든 거야.'
개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괜찮다, 괜찮다 말해본다.
나만이 너를 곱게 씻길 수 있다.
나만이 너의 마음 달랠 수 있다.
늙은 개는 남은 힘을 다해
털끝에 물기를 털어낸다.
지난 날,
네가 버려졌을 서울 어느 길거리에
아픈 기억도 모두 다 털어버렸기를
잠시 바라본다.
버려졌던 기억마저 세월에 거뭇해져
네 기억의 첫 줄에 내가 있기를 바라본다.
네가 나이 들어 딱 하나 좋은 이유다.
"만날 그렇게 개가 10살이라고 말하면 어떡해."
남편의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종종 사람들이 개가 몇 살이냐고 묻곤 했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몇 년이나 "10살이요."라고 말해왔던 차였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지적을 해줬지만 늘 그때뿐, 해가 바뀌면 나는 또다시 같은 대답을 꺼내놓았다. 나는 개의 나이를 세기 귀찮았던 걸까. 개가 영영 나이 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집 개가 몇 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날부터 셈을 해보면 딱 13살이다. 그러나 14살, 15살일지도 모를 일이다. 늙은 개만이 제 나이를 알 테지만 언제나 그렇듯 아무 말이 없다. 책을 찾아보니, 중형견 수명은 15살 즈음이라고 한다. 평균 수명 언저리에 아슬하게 앉아있는 나의 개는 정작 제 나이에 심드렁해 보인다. 개는 지나간 날도, 돌아올 날에도 관심 없다. 그저 오늘, 이 따뜻한 집 어딘가에 조그맣게 똬리를 틀고 누워 있을 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개 나이를 세는 법을 찾아보았다. 우리 집 개는 사람 나이로 80세 정도라고 한다. 개의 나이는 사람과 달라 셈하기가 꽤 복잡하다. 개의 1년은 사람의 1년과 다르다. 노견의 시계는 사람의 그것보다 대략 7~8배 정도로 빠르게 간다. 내가 아무리 개와 나란히 걷는다 한들, 개는 이미 나보다 일고여덟 걸음을 앞서 가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새치기다.
아기의 나이는 보통, 개월 수로 말한다. 두 살이라고 말하기보다는 24개월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한 달이라는 물리적 시간이 아기에게 큰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어제 벽을 잡고 겨우 일어나던 아기가 하루새 갑자기 걷는다. 못 알아들을 옹알이만 하던 아기가 "엄마", "아빠"하고 입을 뻥긋거린다. 극적인 날들이 이어진다. 대소변을 가린다. 제 이름을 쓴다! 한 달 한 달이 축제의 연속이다. (물론 떼가 늘어 축제가 멈추기도 한다.) 그렇게 아기는 자란다. 아기는 하루하루가 신기하고, 왜 밤이라는 게 있어가지고 더 놀 수가 없는 일인지, 서러울 뿐이다.
어른들에게 한 달이란, '다행히 이번에도 급여가 제때 들어왔네.'의 기준이 된다. 별일 없으면 다행인 시간이다. 오죽하면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에게 "별일 없지?"라는 인사를 먼저 건넨다.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건 불안할 일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내일이 이어져야 마음이 잔잔해진다.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은 큰 에너지를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어른에게 하루하루는 다행인 일이고,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기에 안도하는, 그러나 어쩐지 따분한 시간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시간을 산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누구에겐 특별하고, 누구에겐 다행이고, 누구에겐 아련하다. 아기와 늙은 개를 기르고, 키우는 나는 시간이 어서 가주기를 바라면서도, 멈추기를 바란다. 양손에 시간을 잡고서 줄다리기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한쪽의 시간은 어서어서 가라고 궁둥이를 쳐주고 싶고, 한쪽의 시간은 조금만 더디 가라 당기고 싶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아침 댓바람부터 딸이 저지레를 하고 다니는 통에 온몸이 고단하다. 아이 곁에는 늙은 개가 굳은 채 자고 있다. 일 년이고 바뀌지 않는 아버지의 핸드폰 배경화면처럼 아침이고 점심이고 그 자리이다. 둘이 있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뒤숭숭하다. 한 놈은 잎이 다 져서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고목이 따로 없다. 다른 놈은 이제 막 땅 위에 폭 하고 튀어나온 어린 나무 같다. 나는 매일같이 두 나무에게 물을 줘가며 가꾸지만, 갈수록 버석해지는 한 녀석과 힘이 뻗쳐 쭉쭉 가지치기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웃을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아기는 또박또박 자라고 늙은 개는 성큼성큼 나이 든다. 애써 개가 나이 들어 좋은 이유를 찾아본다. 없는 것 같다. 나이 들어서 좋을 이유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다 가만 개를 들여다본다. 보호소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만은 그대로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 옛날 어렴풋이 스며있던 눈물 자국이 없어졌다는 거다. 세월은 네 두 눈에 끼어있던 외로움을 걷어갔다. 그래, 그것으로 됐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얼마일까. 책에서는 2년 남짓이라고 한다. 어쩌면 개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개가 나의 곁을 떠나가도, 빙긋 웃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 기분이 드는 까닭을, 나와 개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사랑했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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