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에 빌붙어서 아부하고 고개 숙여서 정승·판서 나오면 뭐합니까? 우리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지 그걸 자랑해야지.” 전남 보성의 영광 정(丁)씨네 종가 고택을 지키고 있는 정길상 선생이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정씨 고택 거북정(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61호) 사랑채에서 파란만장한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참 희한한 집안 얘길 들었다. “선대로부터 당대의 자손들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를 그려서 8쪽짜리 병풍에 모셔두었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뿐이라면 그다지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몇 대조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하고 몇 분이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는 족보 자랑은 어느 집안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가문의 전설’이니까.
이 집안의 가계도 병풍이 남다른 이유는, 그것이 가문의 영광과 출세의 이력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문(滅門)이 될 경우를 대비해서, 자손들로 하여금 선대의 족적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폐족의 위기를 맞아 뿔뿔이 흩어지는 자식들 손에 황급히 쥐여주는 가문의 증표처럼…. 항일운동과 혁신계 정치운동, 통일운동으로 문중의 수십명이 체포되고 투옥되고 사살당하고 사형당한 내력을 촘촘히 기록해둔 가계도는, 그 어떤 대하소설보다도 비장하고 파란만장하다. 그것은 가문의 성취와 과시가 아니라, 패배와 상처의 처연한 기록이다.
남도에서 손꼽히는 천석지기 부농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민족교육과 항일운동에 거액을 희사하고, 노비문서를 불태워 토지를 무상분배하고, 기근으로 고통받는 빈민들에게 수백석의 구휼미를 풀어서, 스스로 빈한한 가구가 되었던 덕망 높은 가문. 그러나 해방 이후 친일파, 친미파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맞서다가 급기야 1980년 ‘보성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한 집안에서 32명이 체포되고 사형과 징역을 받아 풍비박산이 난 집안. 전남 보성의 영광 정(丁)씨네 이야기다. 종가 고택을 지키고 있는 정길상(70) 선생은 1946년생으로, 해방 이후 수난의 가족사 속에서 살아남은 증인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그는 1980년 11월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어 7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같은 사건으로 형 춘상씨는 사형을 당했고, 어머니와 두 형은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에 마음을 다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교도소 출소 뒤 생계를 위해 외지에 머물던 그가 폐가가 된 고향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오욕과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 속에서 그가 끝내 지키고자 하는 것,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추석 명절을 앞둔 지난 6일,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의 정씨 고택으로 그를 찾아갔다.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는 가훈 바다가 지척인데 마을 제일 안쪽에 위치한 고택은 산사처럼 고즈넉했다. 매처럼 날개를 펼친 매봉산 자락 아래, 400년 전부터 15대를 이어 살아온 정씨 고택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61호로 지정이 될 만큼 유서 깊은 가옥이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정갈한 약수가 사랑채 앞 연못으로 낙수하며 떨어지게 설계되어 있었다. 연못은 한반도 모양으로 생겼는데, 정길상의 부친인 봉강(鳳崗) 정해룡 선생(1913~1969)이 직접 설계해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거로군요.
“그래요. 한반도 모양으로 이 연못을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지금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두만강처럼 (수로를 가리키며) 여기서 쏟아지면 이게 한반도 모양으로 흐르는데, (연못 가운데 세워진 돌들을 가리키며) 이게 민족의 고도 평양, 여기가 서울, 여기가 광주입니다. 이 아래 제주도도 만들고 그 밑으로 물이 빠지게 해놨어요.”
-그냥 인부들한테 맡겨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겠네요.
“직접 일일이 감독을 하셨겠죠. 우리나라가 동쪽이 높고 서쪽이 완만한데, 연못 바닥도 일부러 그렇게 해놓았지 않았습니까? 동쪽은 깊고 서쪽 바닥은 완만하게….”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으니 연못 너머로 푸른 남도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연못 주변엔 오군자(五君子)를 뜻하는 매화, 난초, 국화, 소나무, 대나무가 골고루 심어져 있는데, 나무둥치가 심하게 휘었다가 다시 위로 뻗어나간 소나무 한 그루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저 소나무는 특이하게 생겼는데요.
“이걸 알아보시네. (나무 아래 바위를 가리키며) 여기 뿌리를 보세요. 이 큰 바위틈에서 어린 묘목이 났단 말입니다. 90살 넘은 우리 누님 얘기론, 이 소나무 묘목을 아버님이 어찌나 아끼셨는지 소나무 꺾인다고 이 근처엔 오지도 못하게 했다고 해요.”
-묘목이 다칠까봐서요?
“그렇죠. 소나무가 자라면서 이 바위를 두 동강 내지 않았습니까? 이 나무가 우리 민족의 끈기, 바위를 뚫고 생명을 틔울 만큼 5천년 외세에 버티고 살아나온 지구력, 그걸 닮지 않았나요?”
본격적인 인터뷰를 위해 사랑채에 들어서는데, 머리 위로 큼지막한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 속의 한자를 읽으며) 물위역사죄인(勿爲歷史罪人)?
“‘역사에 죄인이 되지 말라’는 뜻이죠. 봉강 선생(부친)이 누누이 이르던 우리 집 가훈입니다.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도 역사에 죄짓지 말아야 한다고요.”
-이런 유서 깊은 집에 오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이고, 역적 집에 오셔가지고…(웃음) 역적 집이죠.”
그가 껄껄 웃으며 예사로이 말했다. 시대의 풍랑은 그들을 “역적”으로 낙인찍었지만, “역사에 죄를 짓지 말라”는 가훈을 거스르진 않았다는 당당함이 배어 있는 웃음이었다.
남도의 3천석지기 부농 집안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몸담아
노비문서 태우고 토지 나눠주며
빈한한 삶 택한 덕망 높은 가문8쪽짜리 병풍에 새긴 가계도는
가문의 출세 이력 자랑이 아닌
멸문(滅門)에 대비한 가문의 증표
수십명 투옥 내력 등 촘촘히 기록매처럼 날개를 펼친 매봉산 자락 아래, 400년 전부터 15대를 이어 살아온 정씨 고택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261호로 지정이 될 만큼 유서 깊은 가옥이다. 뒷산에서 내려오는 정갈한 약수가 낙수하며 떨어지도록 설계된 사랑채 앞 한반도 모양의 연못 옆에 정길상 선생이 앉아 있다. 보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우리가 어떤 가문인데 친일을 하나?정길상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보좌했던 정경달의 14대손이다. 조선대 사학과 김경숙 교수에 따르면, 정경달은 문과에 급제해서 경북 선산 부사로 부임한 뒤 임진왜란을 맞아 선산이 함락되자, 인근 금오산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아 일본군 수백명을 참수한 인물이다. 그 소식을 듣고 이순신은 정경달을 종사관으로 임명했는데,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을 때는 “유능한 장군을 죽이면 국운이 위태롭다”고 선조에게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훗날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정경달을 “지방 수령의 모범”으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정경달의 유훈이 가풍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 동네 애들은 세살 먹어서부터 할아버지 무릎에서 하늘 천, 따 지를 배우는데 그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얘기지. 너는 정경달의 몇 대 손이냐? 정경달은 무엇을 했느냐? 충무공하곤 어떤 관계냐?… 아버님도 충무공 탄신기념일이 되면, 꼭 집안에서 탄신기념을 하고 식사 때 여러 가지 이야길 하셨어요.”
-아, 충무공 탄신기념일도 집안 의례로 치르셨다고요?
“네, 4월28일이지요. 식사하면서 우리들한테 이런저런 이야길 하시는데, 병자호란 때 삼학사(청나라에 결사항전을 주장하다가 참형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이야기를 하면서, ‘주화파가 옳으냐? 주전파가 옳으냐? 너희 생각은 어떠냐?’ 묻기도 하시고.”
-자녀들한테 역사논쟁을 시키셨네요.
“그런 거지.(웃음)”
정길상에게 정해룡은 단순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사상적 스승이자 삶의 모범이다. 봉강 정해룡은 7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인 정각수 아래서 성장했다. 그에겐 2살 터울의 동생 정해진이 있었다. 종손인 정해룡은 조부의 가르침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집안을 지켰지만, 동생에게는 할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신학문을 익히게 했다. 총명한 동생은 광주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대 예과를 거쳐 동경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형 해룡도 틈틈이 와세다대학 강의록으로 공부하며 소정의 과정을 이수했다.
-증조부(정각수) 대까지도 3천석지기 부농집안이었는데, 그 뒤로 가산이 계속 줄어든 거죠?
“증조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책임자인 문창범한테 거금을 건네거나 민립대학 건립운동을 하던 인촌 김성수한테 거액의 후원금을 전달하곤 했어요. 노쇠해진 증조부를 대신해서 우리 아버님이 실제로 결정하신 일이라고 봐야지.”
-그럼 정해룡 선생도 인촌과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였나요?
“중간에 인촌하고는 결별한 셈이지요. 그래서 본인이 직접 민족교육기관으로 1937년에 양정원을 설립한 거예요. 한글하고 역사 가르치도록 땅 내놓고 선생 모시고 해서….”
-김성수가 1932년 보성전문학교(오늘날 고려대) 인수할 때까지도 거액을 지원하셨는데.
“그땐 뜻이 같았으니까. 그 뒤로 교류가 없어졌지.”
-실제로 30년대 후반쯤 되면 민족주의 계열이 친일로 많이 돌아서고 그랬잖아요.
“이 집안에선 그럴 수가 없어. 저 가훈, 이 집안의 전통과 정경달, 정명열, 정남일… 그리고 정각수가 유훈으로 남긴 ‘삼의당의 정신’(마땅히 해야 할 세가지 선비의 도리)까지….”
정길상 선생(왼쪽)이 이진순씨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이 땅에서, 백성에게서 찾은 해답 주전자 물이 끓고 있었다. 녹차 잎을 우리는 동안 그는 미리 준비해둔 학술자료며 1930~1940년대 신문기사의 복사본, 오래된 흑백 사진 등을 펼쳐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앉은 사랑채와 연못을 배경으로, 내로라하는 당대 지식인들과 우국지사들이 찍은 기념사진도 적지 않았다. 거북정을 다녀간 많은 이들 가운데, 어떤 이는 대한민국 원로 정치인, 우파의 거두가 되었고 어떤 이는 월북해서 고위직에 올랐으며, 어떤 이는 빨치산으로 입산해 죽었다. 집안 대소사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던 문중 사람 중에도 체포되거나 사살된 이가 수십명이다.
-문중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된 건 숙부 정해진을 통해서인가요?
“그 양반이 동경제대 다닐 때 방학이 돼서 고향에 온다고 기별이 오면, 보성역에 군수, 경찰서장이 미리 사열해 있다가 깍듯이 절을 했대요.”
-하긴 그 시절에 동경제대에 다닌다는 건 이미 고위 관료가 된다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겠지요.
“근데 그 양반들이 여기 오면 그냥 앉아서 술 먹고 바둑 두고 하는 게 아니라 뒷산에 지게 지고 올라가서 풀을 베는 거예요.”
-그 귀한 도련님들이?
“풀 베어서 지게 지고 가요. 그래서 앞 논에다가 부리고, 논둑 고치고, 못줄 잡고, 작두 해서 퇴비 썰고, 일꾼들하고 같이 말이여. 그런 거를 우리 아버지는 다 알지. 그리고 자기 동생이 하는 걸 100% 후원했다고. 광주학생 사건의 주모자인 정해두도 우리 집안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사회주의운동을 하고 있다는 건 집안에서도 다 알고 이 근방 주민들도 다 알았어요.”
-그래서 집안 노비도 다 풀어준 건가요?
“해방 직전에 20여명 노비를 바로 이 자리에 다 앉혀놓고 봉강이 선언을 했답니다. ‘세상이 변했으니 이제 당신들도 자유롭게 떠나라’고. 중농 이상으로 살 수 있게 토지를 챙겨주고 호적에 입적시켜서 법적으로도 조치를 다 취해주고, 되도록 (노비 내력을 모르는) 먼 고장으로 떠나 살라고 그랬대요. 그러니까 노속들이 통곡을 했답니다. ‘서방님, 우리를 버리실랍니까?’ 하고. (간첩)사건 나기 전까지도 명절 무렵만 되면 그분들이 우리 집에 인사하러 오곤 했어요.”
-아버지는 선영을 지키고 한학을 하신 분이고, 숙부는 동경제대생으로 사회주의 물 먹은 사람인데, 이런 일들을 의논할 때 형제간에 갈등은 없었어요?
“아니야, 두 분이 거의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로 보여요. 아버님은 몽양 여운형 계열이고 그 동생은 동경에서 국제공산당에 입당한 사회주의자였지만 이 민족을 구해야겠다, 이 나라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엔 차이가 없었어요.”
-단순한 형제 관계를 넘어서서….
“동지적 형제지.”
-민족주의자들이 하나둘 친일로 훼절하는 걸 보면서 두 분은 다른 돌파구로 좌파운동을 보게 된 걸까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해버리시네.(웃음) 삼촌이 자기 동문들하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일까?’ 찾겠다고 여러 명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들었답니다. 도산 안창호, 이광수, 안재홍, 서재필… 그런데 청년들이 보기에, 그 어른들도 정확한 좌표를 못 찾고 있더래요. 별 도움이 안 되는구나 해서, 여기 율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떠납니다. 다도해로 해서 여수, 부산으로… ‘우리가 갈 좌표는 우리 국토에서 찾자. 선현들, 우리 유적, 이 땅에서 찾자, 이 백성들에게서 찾자’ 하고.”
-감동적이네요. 그래서 찾았나요?
“다도해 다 거치고 육상을 거쳐 만주까지 간 거야. 그리고 거기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항일유격대 모습을 본 거지. ‘아, 이제 답을 찾았다’ 그랬다는군. 정해진이 돌아와서 그 얘길 형에게 한 거예요.”
-그래서 정해룡도 개량주의 노선을 버리고 무장투쟁 노선으로….
“어디 숨어서 삐라나 뿌려쌓고 그래 가지고는 문제 해결이 되겠냐고, 전투를 해야지. 일본의 심장에 총을 겨눠야 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한 거지.”
선대로부터 당대의 자손들까지 이어지는 가계도를 그려서 8쪽짜리 병풍. “멸문(滅門)이 될 경우를 대비해서, 자손들로 하여금 선대의 족적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정길상 선생은 설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아버지가 꿈꾼 미래 그 뒤로는 험난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해방 이후 정해룡은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참여한 이후 줄곧 혁신계 정당운동에 몸담다가 두 차례나 옥고를 겪었고, 정해진은 동경제대를 그만둔 뒤 노동자가 되어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다. 문중에서 여덟명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사살되었고 연좌제에 걸린 가족들은 원하는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는 데도 큰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정씨 고택도 경찰의 습격에 불타 모두 소실될 뻔했다. 안채 마당의 감나무는 시커멓게 타다 남은 밑둥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용케 살아남았다. 청년 정길상의 삶도 그 감나무처럼 신산했다. 천석지기 옥답은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자금으로 모두 처분하고 그가 중학에 입학할 무렵엔 학비는커녕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선생님이 중학교 때 아버님은 감옥에 계셨지요?
“몽양 여운형의 뜻을 이어 중도민족주의 혁신계 정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57년 투옥되었다가,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나서 혁신계 일제검거로 다시 수감되었지요. 내가 보성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인데 석 달을 못 다녔어. 납부금을 못 내 가지고.”
-그래서 목포 해양고등학교에 진학하신 거예요? 전액 무료로 다닐 수 있는 데라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관비로 공부시키니까.”
-그땐 그럼 꿈이 뭐였어요?
“목포 해양고등학교로 가니까 아버님이 ‘장하다’고 하셨어요. 너는 배는 못 타니까 졸업장만 받아오라고.”
-배를 왜 못 타요?
“집안 연좌제 때문에 여권이 안 나오지. 배 몰고 이북 올라갈까봐….(웃음)”
학교는 졸업했지만 취업할 길이 막막해서 다시 교원양성소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가 74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사생활은 길지 못했다. 80년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으로 그의 형 정춘상, 친척 정종희 등과 함께 구속된 것이다. 월북했던 숙부 정해진이 65년과 67년 두 차례 고향집을 찾아와 정해룡과 정춘상, 정종희를 만나고 고정간첩의 임무를 맡겼다는 이유였다. 아버지 정해룡은 67년 작고했고, 정길상은 북에서 숙부가 내려왔었단 사실을 한참 뒤인 75년에 알았다.
-숙부는 내려와서 뭘 부탁하고 간 거죠?
“그건 자기 형(정해룡)밖에 모르지. 두 사람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니, 그 깊은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정춘상은 사형이 확정되어 85년 불귀의 객이 되었고, 정종희는 12년(이후 8년으로 감형), 정길상은 7년형을 언도받았다. 만기 출소 뒤, 정길상은 다시 교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집안의 웃어른들이 독립운동을 하거나 사상운동을 하면 그 자손들은 심각한 상처를 입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걸 해서 좋은지 모르지만, 우리는 당신 자식으로 사느라 너무 힘들었다.” 이런 원망을 하는 경우도 많지요.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해서 교육비도 못 대주고, 끝내 간첩 멍에까지 지워주고 떠난 아버님이 원망스러웠던 적 없습니까?
“없어요. 어떻게든 그 양반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보겠다’ 그랬던 거 같아. 어떻게든지 이 민족을 구하려고 별 약을 다 써봤지 않습니까? 동생을 통해서도 써봤고, 몽양 계열을 통해서도 써봤고, 그다음에 몽양 작고하신 뒤에 혁신계 김성숙, 이동화를 통해서도 힘을 써봤고. 혁신계 다 죽어버리고 한 사람도 말할 사람이 없어지니깐, 보수 우익하고 손잡고 대중당도 해보고. 백방의 약을 다 써본 거야.”
-아버님이 꿈꾸었던 미래는 뭘까요?
“민족자주와 민주주의 아니겠어요?”
-아버님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
“아버님 사상의 핵심은 홍익인간의 정신 같아. ‘세상을 넓게 이롭게 하라’ 그런 정신에서 노비들을 해방하고 빈민 구제하고. 그건 우파, 좌파하고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아버님이 죽을 고비에 처할 때에도 우파 사람들이 도와준 경우가 여러 번 있었어요. 좌·우파 폭넓게 교유하고 덕을 베푸셨어요.”
-아버님에 대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점이 있다면요?
“일찍 돌아가셨다는 거.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결국에는 용돈이 없고 집에 먹을 식량까지 떨어져버린 상태에서 돌아가셨거든. 내가 교편 잡고 조금 더 사셨더라면 용돈 드리고 했을 건데, 자식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상태에서 돈 없이 돌아가시게 한 것이 가장 안타깝지. 3천석 재산을 들었다 놨다 하던 분이 밥을 굶는 상태가 되어도 그 누가 돈 한 닢 써보시라고 손에 못 쥐여준 거, 그게 한이 되죠.”
자랑할 걸 자랑해야지87년 정길상은 징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지만, 간첩 전과자를 써주는 직장은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그는 항타기(말뚝박는 중장비) 기술을 배워 건설 현장에서 막일을 했다. 기름 덩어리를 뒤집어쓰고 흙 범벅이 되어 하루 21시간씩 일을 하다가, 못 견디게 힘들 때는 통곡을 하고 운 적도 있다. 그렇게 20여년을 일했다. 다행히 집안의 풍파 속에서도 용케 견뎌준 아내 덕에 슬하의 세 딸도 잘 자라서 각자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다시 정씨 고택으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집은 누가 관리했나요?
“20년간 비어 있었지. 마당에도 지붕에도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풀이 자라고… 자려고 안채에 누웠는데 천장이 뻥 뚫려서 하늘이 보이고 흙덩이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처음엔 아주 볼 수가 없었어요.”
-정말 흉가가 되어 있었던 거네요.
“간첩 집이라고 하니까 도둑도 얼씬을 안 했다니까. 우리 집에 선대로부터 내려온 고서적이 500여권이 있고 고문서도 3천~4천개가 있었는데, 간첩이라니까 도벌꾼도 얼씬하지 않은 거요.(웃음) 문서고 집기고 그대로 있더라고. 덕분에 고서적은 전남대 도서관에 무사히 위탁할 수 있었지.”
-근데 왜 이 폐가에 돌아오셨어요?
“역사에 남겨야 하니까. 지난 400년간 이 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여기 부친이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서 연못을 내다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내가 좀 되물읍시다. 당신이 나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어?”
-에고, 좀 편히 살걸….(웃음)
“예끼! 거짓말하지 말고.(웃음) 부친은 저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얼마나 분이 났겠어. 남북은 막혀 있고.”
-인생 잘못 산 것 같다, 후회한 적은 정말 없으세요?
“(펄쩍 뛰며) 아유, 왜 잘못 살아요?”
-좀 편안히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남산 취조실에서 고문당할 때 경관들이 그럽디다. ‘저놈들은 생물(生物)이 아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늘 속에만 있어도 장관, 국회의원 다 할 놈들이,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스스로 쥐구멍에 기어들어 가냐?’고. ‘그래서 사람 죽고 집안 망하고 재산 없어지니 어떠냐?’고 내게 물어봅디다.”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 것이니 당신은 당신대로 사시라고 했지.”
-그러느라고 가족들한테는 어쩜 무책임한 가장이 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한테 가족이란 뭡니까?
“대만 사법고시에 이런 문제가 나왔어. 정치란 무엇인지 간단히 쓰라고. 정치란 무엇인가? 경제를 위한 것이다. 경제(먹고사는 일)는 내 가족과 직결되는 것 아닙니까? 그럼 가족을 위해서 최고 상위 가치는 정치예요.”
-이런 파란만장한 가문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게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왜 부담스러워요?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 옳지. 우리 선현들이 어떻게 살았는데. 정경달부터….”
-저 사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우리 가문에 정승·판서 몇 나오고…’ 이런 족보 자랑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오늘 선생님 가문 얘기는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웃음)
“외세에 빌붙어서 아부하고 고개 숙여서 정승·판서 나오면 뭐합니까? 우리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지 그걸 자랑해야지. 민(民)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그걸 자랑해야지.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지. 죽은 송장 치켜들고 뭘 할 것이여. 허허허.”
녹취 심지연▶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