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인터뷰

짠맛 잃지 않은 한 알의 소금,박준영

나나수키 2016. 8. 12. 17:01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그러나 소금 같은 변호사 박준영

등록 :2015-12-18 18:57수정 :2015-12-22 14:32

 

“스스로 목소리를 낼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 그걸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사람.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원천동 자신의 사무실에 서 있다. 책상 위엔 각종 사건 관련 문서와 책, 그가 이날 출근길에 사들고 온 감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스스로 목소리를 낼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 그걸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사람.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원천동 자신의 사무실에 서 있다. 책상 위엔 각종 사건 관련 문서와 책, 그가 이날 출근길에 사들고 온 감 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변호사님, 10년을 선고받아 3년이 되어갑니다. 변호사님께서는 매일매일 바쁘시고 도와줄 사람들도 많으시겠지요. 저는 변호사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전화드렸던 아이 엄마입니다. 제 아이가 2년 전에 사고 냈는데 지금까지 재판 중입니다. 저희 아이는 친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이는 칼에 먼저 찔려 쓰러졌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해칠 수 있나요?”

“삼가 글을 올립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하소연하고 눈물로써 간절히 매달려야 이 애절하고 피 터지는 심정을 헤아려 주시겠는지요. 어찌하면 마음의 문을 열어서 이 부족하고도 가여운 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시겠는지요.”

편지지에 꼭꼭 눌러쓴 사연마다 간절하고 필사적인 아우성이 가득했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재소자나 그 가족들한테서 받은 편지가 나란히 줄지어 붙어 있다. 저마다 무고함을 주장하며 도움을 간청하는 사연들이다.

박 변호사는 사무실 벽에 재소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붙여놨다. 그는 “도와주기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판단이 틀릴 수도 있으니 오며 가며 다시 보고 한번 더 생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박 변호사는 사무실 벽에 재소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붙여놨다. 그는 “도와주기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판단이 틀릴 수도 있으니 오며 가며 다시 보고 한번 더 생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이런 편지들은 왜 붙여놓으셨어요?

“지금 판단으론 도와드리기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제 판단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요. 오며 가며 다시 보고 한번 더 생각하려고요.”

내가 편지를 들추는 동안 느슨해진 압정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그가 말했다. 히터를 켜지 않아 썰렁한 사무실엔 그 혼자뿐이었다. 직원 없이 혼자 일한 지 서너 달째라고 했다. 박준영(41) 변호사는 이른바 재심 전문 변호사다. 재심이란, 이미 재판이 끝나서 형이 확정된 사건 가운데 판결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경우 다시 재판하는 제도를 말한다. 그는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2007)으로 기소된 7명의 무죄판결을 이끌어냈고,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 김신혜 친부 살인 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등을 재조사해서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고, 재심을 통해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드문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살인이나 강도 같은 강력 형사사건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몇 년씩 매달려야 하는 일, 성사 가능성이 극히 낮은 일, 돈도 안 되는 일에 그는 왜 그리 열심일까? 유명 세력가나 시국사범도 아니고 가출 청소년, 노숙자, 정신박약자 같은 이들이 연루된 사건, 피의자들 스스로 제 입으로 “죽였다”고 자백한 사건에, 그는 뭘 믿고 뛰어드는 것일까? 2015년의 세밑, 경기도 수원시 원천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다섯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도 그들 얘길 들어주지 않았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지면서 재소자들한테서 편지를 많이 받으시나 봅니다. 너나없이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원문 그대로 100% 다 믿을 수는 없을 텐데요. 어떤 기준으로 사연을 선별하시나요? 진실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있습니까?

“저만의 경험에 의한 직관 같은 게 있어요.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긴 한데, 절박함이 강하게 느껴지는 편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원 노숙소녀 사건으로 기소된 아이들의 경우, 억울하다는 얘기를 최초로 밖에다 전한 대상이 누구냐면, 자기들을 돌봐줬던 청소년상담센터의 선생님이었거든요. 센터 선생님한테 한 아이가 보낸 네장짜리 편지는 누가 봐도 억울함의 표현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편지를 들고 저희 사무실에 찾아오셨고요.”

그때 박준영은 그들 사건의 국선변호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국선변호인을 믿지 않았다. “국선변호사는 검사 편”이라는 헛소문에 아이들이 먼저 마음의 벽을 닫아버린 탓도 있지만, 박준영 변호사도 그때까지는 이 사건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7명의 피고가 모두 범행을 자백한 터라 유무죄를 다툴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2007년 5월 경기도 수원고 화단에서 10대 소녀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원역을 배회하던 20대 노숙인 두명을 검거해서 자백을 받아내고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해 징역 5년과 벌금 200만원을 각각 선고했다. 이어서 이듬해인 2008년 1월, 10대 가출 청소년 5명을 추가 검거해서 범행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같은 혐의로 기소했다. 가정파탄과 생활고로 가출한 청소년들에겐 그들을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부모도 없었다.

당시 박준영은 고졸 학력의 ‘끗발 없는’ 변호사로, 수입이나 착실히 올리자는 생각에 건당 20만원씩 하는 국선변호를 한 달에 70건 많게는 100건씩 맡아 하던 속칭 ‘국선재벌’이었다. 한자리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재판에, 때로는 자신이 변호하는 피고의 이름을 헛갈릴 정도로 당시 그는 ‘박리다매형’ 영업자에 가까웠다. 그런 박준영의 변호사 인생에 큰 경종을 울린 것은, 수원 사건으로 기소된 아이가 쓴 한통의 편지였다.

“참 암울해요. 쌤(상담센터 선생님)은 내가 정말 그랬다고 생각해요? … 내가 아무리 가출해서 양아치처럼 살았지만 쌤만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안 했다고 난리쳐도 검사가 몰아붙여서, 난동 피우면 없던 죄도 생길까봐, 막장이다 생각하고 인정했어요. 선생님과 했던 약속 지키려고 애를 썼는데 설마 제가 사람을 죽였을까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아이들의 진심이 거기 담겨 있었다. 이후 1년여간 박준영은 수사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다. 상담센터 선생님들과 현장을 수십차례 답사하고 폐회로텔레비전(CCTV) 기록과 검찰의 진술영상도 꼼꼼히 확인했다. 아이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엔 변호사 앞에서조차 “자신들이 죽였다”고 말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사건 현장에 있지 않았고 범행과 무관했다. 경찰과 검찰의 짜맞추기 수사에 판단력이 미숙하고 겁 많은 아이들이 거짓자백을 했음이 드러났다. 결국 2010년 7월 가출청소년 전원에 대해서 무죄가 확정되었고, 먼저 형을 선고받아 수형생활을 하던 노숙인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을 몰라 죄 없이 징역살이를 하던 노숙인을 찾아가 재심 청구를 하겠다고 먼저 나선 것도 박준영 변호사였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 그걸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했다.

수원 노숙소녀살인 무죄 이끌고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과
김신혜 친부살인 재조사해 재심 청구
약자들 연루사건마다 뛰어드는 그
그것도 ‘하늘 별 따기’라는 재심에

고졸 학력의 ‘끗발 없는’ 변호사
수입이나 올리자며 시작한 국선변호
한달에 많게는 100건씩 맡아 하다
수원사건 기소된 아이의 편지 한통
변호사 인생에 경종을 울리다

‘너만 빼고 자백했대’ 검사의 기망

-이 사건을 보면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이렇게 조작될 수 있을까 의문이 가요. 기소된 아이들이나 노숙인의 경우, 변호사님이 찾아가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처음엔 모두 자기들이 죽였다고 얘기를 했잖아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흔히들 고문, 폭행이나 협박. 자기한테 가해지는 참을 수 없는 폭압적 상황에서 허위자백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수원 노숙소녀 사건을 놓고 봅시다. 미성년자에다가 가정이 해체된 아이들. 누구의 도움을 받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고, 내가 여기서 자백을 해야 그나마 혜택이 주어질 것 같은 그런 상황. 그런 상황에 누가 놓여봤냐고요? 그러니까 허위진술이나 허위자백의 문제는 합리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이해가 안 돼요. 허위자백이란 것 자체가, 비이성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일이거든요. 허위자백 문제는 경험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지, 합리적 사고론 절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예. 우리가 체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라서 합리적 틀로는 설명이 불가능하죠. 검사는 계속 추궁을 하고 ‘너 죽였잖아?’ 하는데 계속 아니라고 해도, ‘다른 애들은 다 말했는데 왜 너만 아니라고 해?’ 하니깐 넘어간 거예요. 검사가 기망(欺罔)을 한 거죠.”

-‘기망’이라면… 검사가 거짓말을 한 거라고요?

“그렇죠. 사실은 안 그런데, ‘너만 빼고 다 자백했다’고 얘기하는 것. 그러면 듣는 사람은, ‘쟤네들이 왜 그랬을까?’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다들 죽였다고 했다는데 나만 혼자 부인했을 때 나한테 가해질 불이익을 생각하는 거고… ‘자백하면 선처해주겠다’ 그러면 사람 심리는 동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는 심리적으로도 약자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목소리 높여 다그치면 진실이 무엇이든 일단 주눅 들고 수그린다. 박준영은 그런 왜소한 자들의 비애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9일 인터뷰 중 잠시 말을 멈추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있다. 그는 “침묵하지 않고 잘못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 귀찮더라도 나서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엔 의미있는 발전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9일 인터뷰 중 잠시 말을 멈추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신중히 단어를 고르고 있다. 그는 “침묵하지 않고 잘못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 귀찮더라도 나서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엔 의미있는 발전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가출, 자퇴, 비행으로 얼룩진 청소년기

그는 1974년 전남 완도 옆의 노화도란 작은 섬에서 태어나 자랐다. 목포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다가 망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평소에는 더없이 유순하고 마음 넓은 사람이었지만 술만 먹으면 180도 달라졌다. 아버지가 술 먹고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새벽마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소년은 아침에 뇌선(두통약)과 파스를 사러 나가야 했다.

박준영을 만든 시간들
박준영을 만든 시간들
중2 때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술을 끊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중학교를 1등으로 입학한 박준영은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고 싶단 생각에 아버지를 졸라 광주로 유학을 갔고, 고1이 돼서는 바로 자퇴를 하고 서울로 인천으로 떠돌며 닥치는 대로 일했다. 프레스공장, 정비공장에서 막일을 하기도 하고 배달일도 하면서 또래 친구들과 주먹질을 하고 몰려 다녔다.

-그땐 뭐가 될 생각이었어요?

“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웃음)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따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날마다 술 먹고 놀고 담배 피우고….”

-더 나쁜 짓은 안 하셨어요?

“했죠.(웃음) 남의 물건 훔치기도 하고 사람도 패고….”

-그래도 어떻게 전과는 없으세요?

“그게 안 걸렸으니까요. 하하하….”

-그래서인가요? 가출 청소년이나 노숙자에 대해서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예비범죄인 보듯 하잖아요.

“난 그렇게는 안 봐요. ‘너도 집에 무슨 문제가 있나 보다’ 하지. 청소년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한번 낙인 찍어버리면 그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죠.”

가출 청소년인 박준영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만든 힘은, 그가 끝내 마음에서 지울 수 없었던 어머니의 유서였다.

 

너희 셋이 지금처럼 공부하고 말 잘 들으면 엄마가 없어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단다. 엄마가 없다고 술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 그것같이 불쌍하고 불행한 것 없다. 그 점을 언제나 머리 숙여 염두해라. 어린 너희를 놔두고 가는 내 마음을 헤아려다오. 기가 막혀서 통곡을 한다.(어머니의 유서 중에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종합고 취업반으로 졸업하고 94년 목포대 전자공학과에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입학했다. 군에 다녀와 복학하려 했으나 기대했던 장학금을 못 받게 돼서 포기하고 군대 선임을 따라 97년부터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네가 무슨 사법시험을 보냐?”고 친척들조차 면박을 줬지만 “넌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늘 용을 본 태몽을 얘기했던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악착같이 공부한 덕에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그토록 원망했던 아버지는 그가 법조인이 되는 걸 보지 못한 채 빚만 잔뜩 남기고 돌아가셨다. 그가 ‘개천에서 난 용’으로 승천하는 길은, 배경 좋은 색시 만나고 좋은 로펌 들어가서 한몫 잡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벌도, 집안도, 인맥도 없이 부양할 형제들만 잔뜩 있는 그를 불러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변호사로서의 소명의식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었군요.

“소명의식이 어딨어요? 사법시험 준비할 때는 ‘시험 되면 불쌍한 사람들 돕고 이 사회를 위해 산다’고 거창하게 합격 수기를 쓰지만, 그런 게 언제 무너지는지 아세요? 주변 사람들이 ‘영감’이라고 대우해주고, 연수원 가서 양복 입고 다니면서 코스요리 먹고 바에서 술 한잔하다 보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나도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게 안 돼서 수원까지 온 거지. 살다 보니 그게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지만.”

-이젠 대기업이나 로펌 못 간 거에 아쉬움이 없나 보죠?

“전혀요! 여기 온 덕에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이라는 기회를 잡았잖아요. 여기 안 왔으면 어떻게 그걸 했겠어요. 내 인생을 바꾼 사건인데.”

 

나서지 못할망정 주저앉히지는 말아야

-지금 맡고 있는 재심 사건의 피고는 대개 지적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 탈북자, 아주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자기방어권이 미약한 이런 사람들에겐 재심제도가 그나마 한줄기 구원의 빛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우리나라에 재심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원래부터 있었어요. 형사소송법이 만들어질 때부터. 시국사건 같은 경우엔 재심이 많았고, 간통이나 혼인빙자간음 사건처럼 위헌결정이 내려진 경우에도 재심이 돼요. 근데 일반 형사사건 중범죄의 경우엔 지금까지 재심이 된 건 제가 알고 있는 한, 단 두건뿐입니다.”

-한건은 방금 말씀하신 수원 노숙소녀 사건이고, 또 한건은 뭐예요?

“그 이전에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 살해 사건’이라고.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프가 됐던 사건입니다. 1972년에 발생했던 사건인데, 재심 청구가 기각되었다가 과거사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하게 된 거지요.(누명을 쓰고 15년 복역한 정원섭씨는 2008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과거사위원회 같은 공권력의 개입 없이 재심으로 무죄가 난 중범죄 사건은 수원 노숙소녀 사건이 유일한 것 같아요.”

-누명을 쓰고 옥살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진범은 안 잡혔다는 얘기 아닙니까?

“익산의 택시기사 살인 사건이나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은 둘 다 형이 확정돼서 복역하고 있는 가운데 진범이 나타났어요. 근데 진범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다 풀어줬죠. 무혐의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검사가 자기들 잘못이 밝혀지면 곤란하니까 아주 더러운 일을 한 거예요. 자기들 보신하려고.”

-법을 수호해야 할 사람들이, 법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법조인 모임에 가보면, ‘사건 수임 얼마나 했냐?’, ‘어디랑 파트너 됐냐?’… 대화 주제가 그런 거예요. ‘내 주변에 안타까운 사건 있는데 도와줄 사람 없을까? 뭘 좀 바꿔볼 수 있을까?’ 그런 대화는 거의 오고 가지 않아요. 물질만능으로 물질이 ‘만고땡’인 것처럼 지내다 보니 사람 중심의 가치가 무너진 거죠. 남을 돕는다고 의미있는 결심을 한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서 대개 그러잖아요. ‘야, 니 처자식 간수부터 해라’ 하고….”

-하하하, 많이 들어보셨나 봐요.

“상대를 위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조언을 하는 사람 자체가 용기를 못 내니까 상대방까지 같이 주저앉혀 버리려고 하는 얘기일 수 있어요. 자기가 그런 용기가 안 난다고 남까지 주저앉혀서는 안 되잖아요. 먼저 용기를 내는 사람한테 ‘그래,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을까?’ 그래야 맞죠.”

-그런데 정말 식구들은 어떻게 챙기고 계십니까? 재심 사건 맡아서는 큰돈이 안 될 텐데.

“재심 사건이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려요. 수원 노숙소녀 사건은 무죄판결까지 5년이 걸렸고 다른 익산 사건이나 삼례 사건 같은 경우도 2010년에 손대기 시작했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고요.”

-수임료는 어떻게 받으세요?

“수원 노숙소녀 사건의 경우에는 수임료를 아예 안 받았어요. 무죄판결 난 뒤 받은 배상금의 10%는 청소년센터에 기부하라고 했지요.”

-그러면 사무실 유지는 어떻게 하시죠? 다른 변호사나 직원들도 모두 내보냈다고 하셨는데.

“수원 노숙소녀 사건 무죄판결 나고 여기저기서 불티나게 연락이 왔고요. 변호사 두명, 직원도 서너명으로 사무실을 키우는 중이었어요. 그러곤 오랜만에 식구들하고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올림픽대로에서 장경욱 변호사 전화를 받았어요. 전 장경욱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탈북자 허위자백 사건이 있는데 좀 도와달라’ 그래서, ‘해보겠다’고 그 자리에서 승낙했죠. 그길로 사무실 와가지고 ‘장경욱’ 쳐보니까 ‘어이쿠! 큰일 났네!’ 싶었죠.(웃음)”

-‘간첩조작 사건 전문 변호사’라고 떴겠네요. 하하하.

“엄청 후회했어요.(웃음) 저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도 안 들고 국가보안법은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무척 경계했지요. 근데 점점 몰입을 하게 되더라고요. 탈북자의 실상을 보게 됐거든요. 우리나라에 온 탈북자들이 하나원 가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2만7천명이라는 사람들이 중앙합동신문센터(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개칭)에 가서 그렇게 반인권적 심문을 받는 줄 몰랐어요. 그분들이 남한 와서 자기 신분을 조선인으로 숨기고 경제활동 하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았어요. 저 사람들이 혈혈단신 자유 찾아 왔다가 저러고 산다 생각하니까 안타깝고 불쌍했어요. 내가 거기(북한에) 태어났으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잖아요.”

술 취한 아버지에 대한 악몽
완도서 광주로 왔지만 고1 자퇴
막일, 배달일, 친구들과 주먹질
어머니의 유서가 바꾼 인생
대학 포기하고 사법시험 도전

“흔히들 고문이나 협박을 받아
허위자백했다 보는데 아니에요
허위진술이나 허위자백 문제는
합리적 상황서 절대 이해 안돼요
합리적 사고로는 절대로, 절대로”

 

집주인이 월세도 안 올려요!

-하지만 변호사가 무슨 사회운동가나 종교인도 아니고, 수임료를 갖고 생활해야 하는데.

“당연히 개인생활에는 타격이 있죠. 지금 집중하고 있는 세건의 재심 사건을 저는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어요. 그게 성공하면 우리 사법제도나 재심제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아질 텐데, 지금 이 순간 돈을 못 벌고 힘들더라도 한번 가볼 만한 인생은 아닌가 생각했어요. 사람이 얍삽하다 보니까 사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죠. 내가 잘되고 유명해질 건 빤히 보이거든요.(웃음) 그럼 어찌 됐든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하고.”

-정치 말씀입니까?

“제안을 받은 적도 있는데 그건 안 해요. 재심 사건이 한두 해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거 하다 말고 손 뗄 수 없어요. 체질에도 안 맞고요.”

-그럼 뭘로 먹고살아요?

“내년에는 학원 강사를 할까 생각도 하고요. 형사소송법이나 재심에 대해서 경험한 바가 많으니.(웃음) 책을 써서 강연을 다닐 수도 있겠고요. 뭐, 구체적인 건 없지만, 굶어 죽진 않겠다 생각해요. 올해 변협(대한변호사협회)에서 주는 공익대상도 받고 노근리 평화상도 받았는데 각각 상금이 천만원씩이었거든요.”

-아, 생각보다 많이 주네요.

“(웃음) 돈 떨어질 때마다(웃음) 사람 또 얄팍한 게 또 어디서 주지 않을까 하고….”

-하하하….

“신문에, 법률신문에 밑에 무슨 공고 나면, 무슨 문화상, 무슨 법률상 있으면 사람이 또 괜히 솔깃하게 되고 상금 보게 되고. 하하하….”

-식구들은 뭐라 안 하세요?

“가족들 배곯게 하면서 공익활동을 할 만한 배짱은 없어요. 하지만 일단 전 (변호사) 자격증이 있잖아요. 제가 돈 벌겠다고 마음먹으면 벌 수 있어요. 그런 비굴한 상황이 되면 너무 서글플 것 같긴 하지만요. 지금 우리 집이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55만원인데요. 원래 시세가 월 70만~80만원이에요. 내가 하는 일을 알고 우리 집주인이 월세를 안 올려요. 월세 안 올리고 중문도 달아줬고요. 작년엔 싱크대하고 가스레인지도 갈아줬어요. 엊그제는 직접 만든 효소도 바리바리 보내주시고. 그러니 뭐, 저는 어떻게든 살 거라고 봐요.(웃음)”

-낙관적이시네요.

“올해 재심 청구 중인 사건 세개를 ‘다음 스토리펀딩’에 올렸는데, 함께 분노하고 댓글로 응원하고 어떤 분은 눈물을 흘리며 반성했다고 하고, 정말 정의롭고 훌륭한 분들을 많이 봤어요. 익산 사건의 경우에도 진범을 잡았던 경찰이 나서서 증언해주고, 삼례 사건에선 피해자들이 저 사람들 범인 아니라고 나서주고. 내 얘기는 ‘침묵하지 말자’는 거죠. 침묵하지 않고 잘못을 아는 사람들이 조금 귀찮더라도 나서주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엔 의미있는 발전이 있을 거예요.”

‘침묵하지 말자’고 박준영은 말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잘난 사람들의 호령이 아니라 작고 왜소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라고, 특별히 거룩하진 않으나 세상을 지키는 소금들의 힘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