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학교 내 연구실에서 만난 김창남 교수가 인터뷰 시작 전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방에 2대의 기타를 두고 수시로 연주를 한다는 그는 음반을 낼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전설로 남고 싶어서”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김두식의 고백 |문화운동가,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지난 2월의 제10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3호선버터플라이가 올해의 음반상을, 싸이가 올해의 음악인상을, 김민기가 공로상을 수상하는 등
화제가 넘친 행사였습니다. 그날의 풍성함은 이명박 정부의 급작스런 지원 중단으로 한때 존폐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방송사나 매니지먼트사의
상업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음악적 완성도를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원칙을 지켜온 뚝심의 결과물이었습니다. 10년의 힘겨운 여정 내내
선정위원장으로 중심을 잡아온 성공회대 김창남 교수는, 70년대 후반 노래패 ‘메아리’에서 시작해 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을 거쳐
2000년대의 한국대중음악상에 이르기까지 문화운동의 한 흐름을 조용히 주도해온 사람입니다. 연구년 후반부를 보내기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의
출국을 앞둔 그를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만났습니다. 노래 한 곡을 부탁받은 그는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사람’과
‘찔레꽃’을 불러주었습니다. 그의 동선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마치 작은 콘서트에 참석한 느낌이었습니다.
‘공장의 불빛’으로 밝힌 메아리의 성공
-예전에는 노래 요청을 받으면 ‘금관의 예수’를 자주 부르셨죠? 79년 제작된 메아리 테이프에서도 그 노래를 부르셨고요. 얼마 전 트위터에 ‘대학시절부터 좋아한
이 노래를 더 부를 수 없을 것 같다’고 적었던데, 작사자인 김지하 시인의 변화 때문인가요?
“뛰어난 곡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고 내 인생의 노래 중 하나인데, 시인 스스로 부정해버린 역사를 제가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더부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슬픈 일이죠.”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의 역할이라면? “71명의 선정위원이 있는데 다들 전문적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라 고집이 세요. 회의하다 보면 굉장히 많이 부딪히는데, 그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게 제 역할이죠. 스폰서를 구하는 것도 제 책임인데 그 부분은 제가 너무 무능해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세요? “기본적으로는 다수결인데 투표 결과를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게 아니라 회의를 통해 의견을 모으고 강력한 이의가 들어오면 다시 토론하고 재투표하면서 방향을잡아가요.”
-국카스텐, 바비 킴, 거미 등 나중에 스타가 된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을 많이 발굴했죠? “부문별로 심사하고 선정하는데, 아무래도 언더, 인디 쪽 장르가 다양하다 보니 그쪽 사람들이 상을 많이 받았어요. 주류 음악은 댄스와 발라드로 한정되지만비주류 음악은 다양한 뮤지션이 존재하니까요. 주류, 비주류를 막론하고 뮤지션들 사이에 자랑스러운 상이라는 생각이 공유되기 시작한 것에 보람을 느껴요.”
-음악뿐만 아니라 만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문화비평 영역을 개척했고, ‘더숲 트리오’ 공연 등 활동영역도 매우 넓은데, 요즘은 주로 어디에 ‘꽂혀’ 지내시나요?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부르주아 시대의 유럽 문화 풍경을 세부적이고 광범위하게 묘사한 책인데 어떻게 한 개인이 그런 방대한 책을썼을까 감탄했죠. 그걸 읽으며 한국문화사를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제가 성장하고 경험한 개발독재시기를 중심으로 우리 세대의 내면 풍경을 정리해보고
싶어요. 이발소에서 봤던 <선데이 서울>, 무협지, 온갖 종류의 허접한 B급 수기류 등. 혹시 <꿀단지>라고 아세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게 뭐죠? “포르노라고 해야 하나, 우리 세대가 돌려보던, 수기를 가장한 소설. 아주 유명한데 모르시는군요. 그런 B급 문화 자료들을 수집한 분을 최근에 만났어요.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을 만든 7~8할은 대단한 경전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B급 문화들이거든요. 유행가도 그렇고요. 그런 것을 어떻게 정리할까 구상중이에요.”
1960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김창남은 지방행정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임지 변경에 따라 초등학교를 다섯 곳이나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몸이 아프셨던 어머니를위해 눈을 뜨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가 접수부터 시키고 등교하는 일이 잦았던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거북이’였습니다.
“몸이 느리고, 말도 머리에서 입까지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그래서 100분토론 같은데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요. 느리다기보다는 굼뜬 거지. 그런데 어려서부터텔레비전 보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 읽는 것에 대한 집착 같은 건 있었어요. 문간방에 세 든 신혼부부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밤마다 그 집에 앉아서 같이
봤어요. 신혼부부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걸 느끼면서도 애국가 나올 때까지 버텼죠. 나 때문인지 신혼부부가 곧 이사를 가버린 다음에는 텔레비전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또 그랬어요. 그 친구와 제일 친한 애들은 안방 윗목에 앉고, 조금 친한 애들은 마루에, 안 친한 애들은 마당에 서서 봐야 했는데, 저는 마당 쪽이었죠.
맨날 서서 보는데도 끝까지 버티곤 했어요.”
“상과대학에 가서 동생들을 돌보라”는 어머니의 유언 같은 한마디를 들은 김창남은 ‘취직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서울대 경영학과를선택했습니다. 유신 말기의 대학은 살벌하고 재미가 없었습니다.
“‘언더’ 학회에 가보니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걸 읽고 토론하는데, 나로서는 너무 모르는 얘기였고, 이미 그런 걸 잘 아는 친구가 따로 있더라고요,유시민 같은. 열등감도 느끼고 재미도 없어서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간 게
메아리였죠.”
아직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동아리 ‘메아리’는 문승현, 김창남 등 78학번들의 참여로 활기를 얻었습니다. 그해 겨울, 선배들의 연락을 받은 그들은 신촌 근방의어느 다방에서 김민기를 처음 만났고, 바로 그날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로 직행해 녹음한 것이 이제는 전설이 된 ‘공장의 불빛’입니다. 불법으로 유통되던
‘공장의 불빛’의 성공에 힘을 얻은 메아리의 “골수”들은 뒤이어 79년의 메아리 1집과 80년의 2집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지하에서 몰래 유통되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알 수 없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영화·책,텔레비전 보는 것에 집착
밤마다 문간방 신혼부부 집서
애국가 나올 때까지 버텨
못 견딘 신혼부부 이사 간 뒤
친구 집 마당에 서서 끝까지… 전선 명확하던 때의 노래운동
억압받은 만큼 박수도 받아
민주화 이후 변화 적응 못한
노찾사는 80년대 시대정신 안고
장렬히 사라지는 게 맞았을 것 월세 2만원에 하숙시켜준 그 고마운 분들 “79~80년을 거치면서 참 갑갑했어요. 내가 한 거라고는 노래운동밖에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되는데 답은 나오지 않고, 몸은 말라가고 건강도 상하고 돈도 없고,
직업운동가의 길에 들어설 용기는 없고. 5·17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된 때에는 한동안 도망도 다녀야 했어요. 대낮에도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지하실에서
친구랑 둘이 자취를 하던 시절인데 좁고 습기 찬 공간에 거의 매일 열댓명이 찾아와 술·담배에 절어 사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추운 시기였지만, 참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던 따뜻한 시기이기도 해요.”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으셨죠?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해서 일단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 앞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는데 그게 광명이었죠. 복덕방 아저씨가굉장히 호의적으로 여기저기 전화하며 방을 구해줬는데, 알고 보니 그 아저씨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다녀온 분이었어요. 그분 덕분에 월세를 깎아 들어간 집은
방 두 칸 중에 하나를 세놓은, 별로 넉넉하지 않은 집이었어요. 자취하겠다고 들어갔지만 밥을 주로 사먹을 생각에 아무 준비도 없었고요. 그런데 제가 밥을 해먹는
기색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차려주시더라고요. 그렇게 하루이틀 얻어먹다 보니 한달이 지나갔어요. 월세 2만원 내고 사실상 하숙을 한 거죠. 초등학생 둘을 키우던
40대 부부였는데, 제가 너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니까, 아주머니께서 ‘그냥 식구로, 동생처럼 생각할 테니까, 그대로 2만원만 내고 이렇게 살자’고 하셨어요.
밥, 청소, 꼭꼭 숨겨놓은 빨래까지 다 해주시고, 술 먹고 늦게 들어가면 식혜까지 머리맡에 한 그릇 놓아주시고, 결국 대학 졸업까지 그렇게 살았어요.
제가 대학원 입학시험 치르고 집에 들어가니 아저씨께서 그제야 ‘사실은 시골에서 조카가 올라오게 되어 있었는데, 시험 준비에 방해가 될까봐 이야기를 못했다’고
하시더군요. 대학원 들어가고 대방동에 방을 얻어 나왔는데, 아주머니께서 거기까지 고추장을 가져다주시곤 했어요. 그 집 아들이 해외지사 발령을 받아 요즘
네덜란드에 있어요. 제가 작년 가을 독일에 있을 때 마침 아주머니가 와 계셔서 찾아뵈었죠. 아주머니께서 또 식혜를 담가주셨어요. 그 시절 그 집 식구들이 살던
안방보다 내 방 연탄불이 꺼질까 봐 더 걱정하셨다고 하시더군요. 안방 연탄불이 꺼지면 네 식구가 함께 사니 덜 춥지만 내 방 불이 꺼지면 혼자서 얼마나 추울까
싶어서 그러셨다고.”
-감동적인 얘기네요. “아주머니는 아침마다 요구르트 배달을 하셨어요. 결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면서 제게 그토록 많은 걸 베풀어주신 거죠. 우연히 만난 인연이 나를 살린 거예요.고비마다 그분처럼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인연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한때는 아이돌 스타? 실제론 소심한 모범생 -운동가요의 시대가 길지 못했던 이유는? “전선이 명확하던 시대에는 억압을 받은 만큼 박수와 조명도 많이 받았죠. 민주화 초창기에는 잠겨 있던 것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노찾사가 그 흐름을 탔고요.민주화가 진행되면서는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 노찾사는 운동단체의 정체성을 버릴 수 없다 보니 변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 면이 있죠. 대중들의 관심 자체가
빨리 사라졌고요. 저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음악을 바꾸기보다는 8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안고 가다가 장렬하게 사라지는 게 노찾사에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성공회대에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이 모인 것은 준비된 기획이었나요? “학위 받고 2년간 다른 학교에 수도 없이 지원했다가 떨어졌어요. 기획은 전혀 아니고, 성공회대는 다른 학교와 좋은 교수 뽑는 기준이 좀 달랐던 것뿐이죠.” -메아리 부회장이었던 조경옥과 연애결혼을 하셨죠. 노래 잘하는 우수에 찬 모습이라 평생 이런저런 유혹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 시대에는 일종의 아이돌 스타아니었나요?
“하하하(폭소). 아이고 무슨.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으면서 내 생각을 족집게처럼 집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김 교수님만큼이나 소심한 모범생 범주를 못벗어나는 사람이에요.”
-보수적인 정부하에서 어떻게 지낼 계획이세요? “당분간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상적 활동을 추구하게 될 거예요. 조금 더 깊고 멀리 보는 정치적 전망을 가져야겠죠. 저는 일단 제가 하는문화 연구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져왔는지 해명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해요.”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르는 그의 말과 노래에는 절제된 자유가 담겨 있었습니다. 고비마다 좋은 인연을 만난 이유도 아마 김창남 자신이 맑고 따뜻한 사람이었던까닭일 겁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봄소식과 그의 백발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