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세상의 다윗들,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 / 김세윤 (방송작가)

나나수키 2013. 3. 16. 21:18

 

등록 : 2013.03.15 19:28 수정 : 2013.03.15 21:38

군 수사관 출신 퇴역 군인 아버지(토미 리 존스·왼쪽)가 군인 아들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의 영화 <엘라의 계곡> 한 장면. 영화 화면 갈무리

 김세윤의 재미핥기

아들이 죽었다. 변사체. 입에 담기에도 흉측한 그 세 음절이 내 아들의 마지막을 설명하는 어휘가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화가 났다. 그리고 미안했다. 의문투성이 사건을 서둘러 종결해버린 군 때문에 화가 났고,

그런 군에 충성하는 게 사나이의 길이라고 아들에게 가르친 사람이 바로 아버지 당신이라서 참 미안했다.

평생 군인으로 살다가 예편한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며 입대한 아들이었다.

그러니 이게 혹시 다 나 때문에 일어난 비극은 아닌가. 아버지는 자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자책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내 아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직접 진실을 밝히겠다고 마음먹은 아버지.

‘체념’을 말하는 자들 앞에서 절대 ‘신념’을 꺾지 않는다. 사람들이 ‘포기’라는 말을 입에 올릴수록 더 ‘용기’를 낸다.

증거 불충분 운운하는 그들에게 충분히 많은 증거를 직접 수집해 들이민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어이 은폐된 진실을 밝혀낸다.

이것은 영화 <엘라의 계곡>(2007·사진) 이야기다.

 

하지만 단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 병사가 부대 인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단순 살인사건으로 결론 내린 군당국에 맞서 병사의 아버지가 혼자 힘으로 진실을 밝혀낸 일이 있었다.

군 수사관 출신 퇴역 군인 아버지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골리앗과 맞서 싸운 다윗을 떠올렸다.

3000년 전 다윗과 골리앗이 대결한 장소 ‘엘라의 계곡’을 영화 제목으로 쓴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의 한 장면.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주인공 행크가 어린 꼬마에게 ‘엘라의 계곡’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다윗이 작은 새총과 돌멩이만으로 거구의 골리앗을 쓰러뜨린 비결을 설명하면서 행크는 사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윗은 자신의 공포심을 이겼어. 그래서 골리앗이 상대가 안 된 거야. 골리앗이 달려오는데 꼼짝 않고 기다렸단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 줄 아니? 괴물하고는 그렇게 싸우는 거야. 다가오게 놔뒀다가 눈을 똑바로 보고 끝장내는 거지.”

 

“군, ‘의문사’ 김훈 중위 15년 만에 순직 인정키로”. 지난주 신문에서 이 헤드라인을 읽고 잠시 감격했다.

영화 속 아버지처럼 퇴역 군인이면서, 영화 속 아버지처럼 거대한 군조직을 상대로 홀로 싸운 그 사람,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괴물 같은 국방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15년을 버틴 아버지에게 기어이 골리앗이 무릎을 꿇었구나, 드디어 다윗이 이겼구나, 혼자 안도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김훈 중위 아버지는 군당국의 결정을 꼼수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선심쓰듯 ‘순직 처리’를 들먹이는 군의 태도에 또 한번 분노하고 있었다.

“국민권익위원회, 국회, 대법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까지 모두 이건 자살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국방부는) 억지를 부려가지고 자살을 주장하는 거예요.

유족이 너무 고통스러운 거죠. 우리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그냥 자살로 해서 순직 처리해줄게, 이거는 너무, 너무 잔인한 겁니다.”

 

울분에 찬 그의 인터뷰를 마저 읽고 다시 영화 속 그 장면을 떠올렸다. 앞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그 장면의 나머지 대사를 생 각했다.

행크의 다윗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다윗은요…, 무섭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골리앗을 앞에 두고 그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엘라의 계곡에 갇혀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지.

어쩌면 다윗은 특별히 용감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용기때문에 특별히 외로워진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는 또다시 계곡으로 걸어 들어간다. 지금 골리앗과 싸우는 이 나라의 모든 다윗들처럼 그의 손엔 또다시 작은 새총과 한줌의 돌멩이만 들려 있다.

벌써 15년. “너무, 너무 잔인한” 세월이다.

 

김세윤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