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늙은 개는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람과 개, 나이 듦에 관하여
이상하죠 요즘.
세상이 잠잠해요.
예전엔 아기가 자주 으앙 하고 울었는데
요즘은 우는 표정만 하고
왜 울지를 않는 건데요?
언니는 왜 그렇게 조그맣게 말하는 거예요.
나, 하나도 안 들려서 조금 신경이 쓰여요.
오빠도 예전엔 퇴근할 때
발소리를 저벅저벅 내서,
내가 현관문까지 마중 갈 수 있었는데.
왜 요즘엔 살금살금 다니는 거예요?
자다가 눈 떠보면
내 앞에서 날 바라보고만 있고.
나 요즘 깜짝깜짝 자주 놀라요.
그래도, 하나 좋은 건 잠이 솔솔 온다는 거예요.
그래도, 조금만 크게 말해줘요.
세상이 너무 조용해요.
우리는 아기였을 때, 어쩌면 다시는 못 받아볼 만큼의 커다란 사랑을 받는다. 스스로 살아갈 여력이 0에 가까운 이 작은 존재는, 같은 이유로 보호받는다. 문득, 대학 교양 수업을 듣던 중에 교수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기는 검은 눈동자,
즉 동공이 비현실적으로 크다.
커다란 동공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렁그렁한 두 눈은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부모의 시선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지속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그러니까 스스로 밥을 떠먹고 용변을 가리고 잠을 잘 줄 알게 되면 아이의 동공은 점차 성인의 그것과 같은 크기로 줄어든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 이 이야기가 교수님의 개인적인 가설이었는지, 진화론에 기댄 가설인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 분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한다. 아무튼 아기의 커다란 눈동자 하나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스스로 살아낼 재간이 없는 아기는 딱 하나 있는 필살기, 즉 눈망울을 반짝반짝하게 빛내어 이 거칠고 척박한 땅 위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았다. 세상에 허투루 만들어진 것은 하나 없다.
강아지의 눈도 아기의 눈과 닮았다. 두 눈에 포도알 같은 검은 눈동자가 꽉 들어차 있다. 그러나 사람과는 달리, 세월이 흘러도 개의 눈빛은 여전해 보인다. 어쩐지 가엾고 늘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눈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강아지일 때와 다를 바 없는 눈이다. 왜일까. 어쩌면 개들은 여전히 이 고단한 땅 위에서 스스로 살아낼 방법을 찾지 못한 건 아닐까.
많은 개들이 사라진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늙은 개들이 사라진다. TV 속 광고나 드라마에는 종종 귀엽고 작은 강아지 나온다. 가족의 행복한 그림에는 어쩐지 강아지가 빠지지 않는다. 없으면 섭섭한 치킨무처럼 그 자리에 있다.
주말마다 사람들이 찾는 대형 마트에는 펫샵이 있다. 거기엔 이제 갓 젖을 뗀 강아지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그곳에 나이 든 개의 자리는 없다.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사람들은 펫샵에서 강아지를 데려오며 우리 가족이 좀 더 행복해지리라 상상한다. (사실 대부분 정말 행복해진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다. TV 속 드라마에는 여전히 어린 강아지들이 드글드글하다. 우리 옆집 뒷집을 둘러본다. 강아지들이 강중강중 뛰며 애교를 떤다. 나이 많은 개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개들은 전부 동안이어서 여전히 강아지처럼 보이기라도 하는 걸까.
아기는 훌쩍 큰다. 아기에게서 언제까지고 날 것 같던 젖냄새는 금세 사라진다. 그리고 제법 어른의 것과도 같은 생활의 냄새를 풍긴다. 앳된 얼굴은 점점 흐릿해지고 어느 틈엔가 성숙한 얼굴이 자리매김한다. 그러면 부모는 우리 아이가 벌써 다 큰 줄로 생각하고 어른처럼 대한다. 어른처럼 기다리기를 기대하고, 어른처럼 체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이는 몸집만 커졌을 뿐, 여전히 부모의 손길이 필요하다.
개도 그러하다. 새털처럼 가벼웠던 몸에는 세월이 비듬처럼 박힌다. 윤기가 흐르던 털은 버석하니 마른다. 전에는 없던 검은 반점이 하나 둘 생기다가 어느 틈에 수두룩하다. 달마시안 개가 따로 없다. 산책을 나가면 종종 "귀엽다"라고 말해주던 사람들이 쏙 사라진다.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며 들릴 듯 말 듯 "개가 많이 늙었네." 하고 말한다. 나의 개는 이제 귀엽지 않다.
우리 집 늙은 개는 청력을 잃었다. 우리끼리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여전히 구석에서 쿨쿨 자고 있다. 코끝으로 다가가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보아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궁둥이라도 쓰다듬어주면, 화들짝 놀라 반가운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른다. 청력은 잃었지만, 가족을 향한 반가움은 잃지 않았다. 그리고 절뚝거리기는 해도 네 발이 아직 건사하다. 꼬리는 어느 때보다 세차게 흔든다.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네 살 된 나의 아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얘도 마음이 있어.
어디에 있냐 하면,
여기 꼬리.
꼬리에 마음이 숨어 있어.
봐봐 꼬리를 흔들지?
지금 마음이 좋다고 말하는 거야.
조용히 아주 조그맣게.
아이는 나이 먹는다는 걸 잘 모른다. 나에게는 나이가 맛있었냐고 물었다. 자기는 나이가 무척 맛있어서 5살을 호로록 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에게 네가 먹는 나이 맛은 어떠냐고 물었다. 개는 시치미 뚝 떼고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늙은 개가 먹은 나이의 맛은 어땠을까. 부디 쓴맛만 나지는 않았기를.
개는 삶과 죽음을 선택하지 못 한다. 대부분 인간이 개의 생과 사를 결정한다. 우리가 예쁘다고 개를 데려오는 것은, 개에게 삶을 불어넣어주는 일이다. 우리가 늙었다고 혹은 말을 안 듣는다고 개를 버리는 것은, 개를 생애 마지막 페이지 가장 끝 단락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우리는 기를 쓰고 산다. 살아낸다. 개들도 그러하다. 살아내고 싶어 한다. 단지 우리에게 안 들릴 뿐 온몸으로, 살랑이는 꼬리로,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나이 듦이 섧지 않도록
나이 먹는 게 외롭지 않도록
나이의 맛을 오로지 쓰고 떫게만 느끼지 않도록
끝까지 옆에 있어주자.
우리도 나이 들기는 매한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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