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 (feat. 개)
41개월간의 가정보육을 마치며
딸이 우유를 잔뜩 엎지른다.
당황한 티 내지 않고서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말하는 일.
개가 화분에 핀 꽃을 다 따먹었다.
큰소리 쳐봤자
늙은 개는 가는 귀가 먹었으니,
"그게 그리 맛있디?"
하고 그냥 웃어버리는 일.
블록이 자꾸 무너진다고 칭얼대는 아이에게
"괜찮아, 다시 쌓으면 되는 거야."
사분사분 일러주는 일.
그러다보니 저절로
세상에 괜찮은 게 더 많아지는 일.
그렇게 엄마가 되고
사람이 되는 일,
엄마의 일.
나의 개
어렸을 때 집에서 키웠던 개들은 사실, 가족 모두의 개였다. 개를 예뻐하는 일은 나의 몫이었지만, 개에게 밥을 주고, 배변을 치워주고, 목욕을 시키는 궂은 일들은 보통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개를 예뻐만 했지 고단한 일은 하지 않았다. 모른 척했다는 게 맞다. 개들이 죽고 사라져도 나는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종종 울었다. 아빠의 눈물을 본 적도 있다. 나는 개를 예뻐했던, 딱 그 정도의 무게만큼만 슬퍼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처음으로 나의 개가 생겼다. 내가 선택해서 데려온 개였다. 온전히 혼자서 개를 돌보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개를 키우는 일이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지 그제야 알았다. 좋은 사료를 챙기고, 꼬박꼬박 산책을 시키고, 접종을 시키고, 목욕을 시키는 일이 종종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잠시 딴 데 한눈을 팔면 개는 금세 지저분해졌다.
많은 개들이 내 곁을 스쳐갔다. 개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 가벼운 말이었다. 그러나 나의 개는 달랐다. '나'와 '개' 사이에 있는 '의'라는 조사가 마치 목줄처럼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이 생명을 죽는 날까지 돌봐야 했다. 개라는 단어가 어렵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였다. 그 묵직한 감정은 다행히도 나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개에게 적당한 산책과 주기적인 목욕은 기본이었다. 개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기형이라 우리는 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가끔 호흡을 어려워해서 오밤중에 의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특정한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사료를 꼼꼼히 살폈다. 모기가 들끓는 여름에는 약을 챙겼다. 나는 점점 돌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더이상 개에게 시간을 뺏긴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을 쪼개어 개와 나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한 존재가 되어갔고, 그럴수록 개의 표정은 밝아졌다.
개를 단숨에 사랑하지는 못했다. 그건 개도 마찬가지였다. 개는 한참이 지나서야, 나를 반겼다. 어느 날 내가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개가 처음으로 꼬리 치며 현관문 앞으로 마중 나온 날을 기억한다. 그날부터였을 거다. 개를 처음 데려왔을 때 느꼈던, 그 아슬아슬한 감정이 이제 모두 사라졌음을 알게된 것은.
'나의 아기'라는 말에는,
그보다 더 무거운 추가 달려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가정을 꾸렸다. 아이가 생겼다. 꼬박 24시간을 진통해서 아이를 품에 안았다. TV에서 봤던 감동의 시간은 따로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아기를 기계적으로 안았다. 나는 무언가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오래 필요한 사람이었다. 감동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내가 보고 배운 바로는 엄마란 무릇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옆에 앉은 산모가 아기를 신줏단지 모시듯 감싸 안으며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어째서 내 입에선 저런 사랑스러운 말이 나오질 않는 걸까. 나는 좀 모자란 어미일까. 아기에 대한 애정보다 내 아픈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먼저였다. 뭔가 크게 잘못됐구나, 싶었다. 나는 데면데면 아기를 바라봤다. 그날 밤 나는 조금 울었다.
아기를 낳고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나는 그날도 잠든 아기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는 한참을 자다가 깨어났다. 아기는 기지개를 쭉 켜고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기는 세상에서 본 적 없는 미소를 내게 건넸다. "미소가 눈부셨다."라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그러나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말해본 적 없는 그 말을 떠올리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와르르 무너졌다. 멍청한 눈으로 아기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봇물 터지듯 말했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너무 사랑해." TV에서나 보던 그 모성애 넘치는 엄마가 바로 나였다. 그날부로 나는 진짜 엄마가 됐다.
모성애가 처음부터 가득 채워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처럼 모성애가 쫄쫄쫄 흘러 뒤늦게 겨우 찰랑찰랑 채워지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게 엄마가 됐지만, 그게 거기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개를 돌보는 일과 견줄 바가 아니었다. 아기는 쉴 새 없이 울었고, 쌌고, 먹었다. 달래야 했고, 놀아줘야 했고, 안아줘야 했다. 내 몸 같지 않은 몸으로 그 일들을 해내야 했다. 나이 든 개까지 돌봐야 하니 나는 지쳐서 멍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까르륵 웃는 소리가 나기에 뒤돌아보니, 아기가 개 꼬리를 잡고 놀고 있었다. 개는 무심히 그런 아기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놀았다. 신기한 일들이 이어졌다. 집안일을 하다가 개가 컹컹 짖기에 방에 따라가 보니, 아기가 기고 있었다. 개는 누워만 있던 아기가 저처럼 움직이는 게 신기했던 걸까. 개의 표정을 보니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세상에, 작은 인간이 기고 있어!"
그런 사소한 일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하루하루 꿰어졌다. 내내 울상이었던 나의 얼굴에도 조금씩 미소가 걸렸다.
개는 본의 아니게 여러 역할을 해내고 있다. 주로 내가 집안일을 할 때 그렇다. 딸애가 <선생님 놀이>를 할 때면, 개는 영락없이 학생이 되고, <엄마 놀이>를 할 때에는 아기가 되어준다. 환자가 될 때도 있고, 거대한 괴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딸은 개에게 기대어 간식을 나눠먹고, 대답 없는 개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건다. 종종 생각한다. 우리 개 없이, 나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온전히 집에서 키울 수 있었을까?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또 생각한다. 내가 개를 키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나는, 진짜 엄마가 되는 데 까지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지도 모른다.
3월이 되면 아이가 유치원에 간다. 벌써 아이가 다섯 살이 됐다는 게 얼떨떨하다. 41개월간 아이와 참 열심히도 놀았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힘들 때에는 불쑥불쑥 어린이집을 생각하기도 했다. 고백하자면 아기가 미울 때도 있었다. 가정보육을 한답시고 집안일과 육아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할 때에는 아이가 밉게 보였다.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며 아기에게 못된 소리도 했다. 하지만 딸은 나를 미워한 적이 없다. 아기는 미워할 줄을 몰랐다.
온종일 누군가의 허점을 찾기 바쁜 사람이 있다. 누군가와 나를 끝없이 비교하며 타인을, 결국엔 나 자신을 미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미움은 나의 힘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개는 어떨까. 개에게는 미움이라는 감정이 없어 보인다. 버림받아도 끝까지 주인을 기다린다. 학대당하는 개조차 밥그릇을 든 주인을 향해 꼬리 친다. 개시장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개 조차도 마지막까지 살아보기 위해 몽둥이를 든 장정에게 희미하게나마 꼬리를 살랑거린다. 개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미운 마음을 품을 줄 모른다. 애초에 개에게도 가슴에 미울 구석자리 하나 없다.
사랑밖에 모르는 두 녀석과 몸을 맞대고 있으면, 나도 미움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아이의 웃음과 개의 한결같은 눈빛에 둘러싸여 본 적 있는가. 세상에, 가정보육을 100개월이라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한다. 아이가 공립유치원에 합격해버렸다.)
오후 다섯 시, 가장 힘든 시간이다. 잠시도 쉬지 않는 아이를 쫓아다니다가 지쳐 방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어느 틈엔가 아기가 쪼르르 다가와 말을 건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기운 좀 내봐."하며 무릎에 앉는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개도 엉기엉기 걸어와 남은 무릎에 걸터앉는다. 개와 아기가 기분 좋은 무게로 지친 마음을 자근자근 밟아준다. 보살펴야 할 이들에게서 되려 보살핌을 받는다. 내가 지금껏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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