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인터뷰

詩사랑 인생,문길섭

나나수키 2015. 7. 2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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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길섭 시암송국민운동본부 대표가 자주 찾는 전남 화순 만연사 뒤 오감연결길에서 시를 암송하다 소나무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한 사내가 홀로 광주천을 오래 걷는다.

그 산책길에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시가 말을 건네온다. 사내는 마음이 산란할 때엔 광주시내에서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전남 화순군 화순읍 만연사 뒤 오감연결길에 간다. 치유의 길로 유명한 이 길을 오르며 시를 읊는다. 그러면 홀로 걷는 그의 가슴엔 바람이 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여름이면 더위를 가셔주고, 겨울이면 모닥불을 지피고, 슬플 때는 위로가 된다. 그가 괴로울 때 시는 시름 너머 낙원으로 실어나르는 천사다. 문길섭(61)씨 곁엔 이렇게 천 명의 천사가 함께하고 있다.


그는 무려 천 편의 시를 외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꼬박 밤을 새워 10시간쯤 글자 하나 안 보고, 10시간 동안 시만 외우며 세상의 희로애락을 거닐 수도 있다.


10년 전부터
시암송 국민운동 전개
시가 있어 상처를 딛고
불면증을 이기고
무료함이 없어지고
짜증나는 시간조차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가 천 편이 넘는 시를 암송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이든 한 번 보면 잊지 않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져서가 아니다. 그는 외우면 잊어버리고 또 외우면 잊어버리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는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광주천가에 있는 소공연장인 드맹아트홀 운영자다. 그가 시를 암송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40대 초반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 경기도 어느 마을의 시골교회에서 봉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 교회에 다니던 여학생이 안부전화를 했다. 그는 통화 중 정지용의 <향수>와 김소월의 <산>을 줄줄 외웠다. 듣기가 참 좋고 부러워 나도 외워보자고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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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의 인연은 훨씬 오래전부터였다. 그는 아버지가 시골 의원을 한 전남 보성과 장흥에서 도시인 광주로 올라오기 전까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쳤다. 시골에서 산 추억을 아직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시골스런 그가 광주에 올라와 도시에 적응하기 어려울 때도 위로를 준 것은 시였다. 중학교 때 한 선생님이 김소월의 <초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외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고교 때 한번은 한 친구가 백운동 저수지로 갔는데 어둑한 밤 저수지 둑에서 별을 보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천천히 외웠다. 그 암송시를 들으며 하늘의 별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 간호사였던 한 고향 누나가 엽서에 적어 보낸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시가 아닌 마음을 읽은 적도 있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 출신인 그는 전방에서 소대장을 했다. 그러나 그는 군스타일이 아니었다. 강압적이고 복종 일변도인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힘들었다. 그러나 그 시기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푸시킨의 시가 있어 무난히 건너올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살 때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숙제를 보니 ‘시를 암송해 오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선생님은 매주 시가 적힌 종이를 복사해 한장씩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가 이 종이를 노트 왼편에 붙이고, 오른편엔 시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아이들은 이렇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통 100편의 시를 외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국어를 사랑하도록 이끈 교육이 프랑스의 문화적 힘이 되는 듯했다. 독일도 고교 졸업 때까지 시 100편을 외우도록 한단다.

이런 유럽의 풍토를 본 것도 그가 ‘시 외는 남자’가 되게 한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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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구 사동 광주천가 드맹빌딩 2층 시암송국민운동본부에서 문길섭 대표와 누나 문광자 이사장.


처음엔 욕심내지 않고 1주일에 한 편씩 외웠다. 시 암송의 길은 외우고 또 외우는 방법 외에는 왕도가 없다. 처음엔 외우면 잊어버리고, 다 외워도 몇시간 지나면 생각이 나지 않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에 반복을 더하다 보니 암송시가 한 편 두 편 늘고, 50편이 되고, 100편이 되었다. 암송시가 400편쯤 되자 시를 외우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뒤엔 무료할 시간이 없었다. 차가 밀리거나 출발시간을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짜증이 나기는커녕 시를 암송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언젠가 서울에서 광주에 내려오는 기차를 타려고 용산역에 갔는데 출발시간이 두 시간이 남았다. 예전 같으면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배회했겠지만, 한적한 구석에 앉아 시를 외우다 보니 두 시간이 단꿈처럼 지나갔다. 시를 암송한 뒤부터는 불면증도 걱정할 게 없었다. 잠자리에서 시를 외우다 보면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화나고 힘들고 감정의 기복이 생길 때도 시를 외우는 데 집중하다 보면 시를 따라 평화로운 별을 산책하곤 했다.


이렇게 좋은 시암송을 사람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6년 시암송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대표를 맡았다. 드맹빌딩 1층에서 드맹패션을 운영하는 드맹 대표인 그의 누나 문광자(69)씨가 그를 적극 돕고 나섰다. 누나의 후원으로 명시 한 편씩 한 장의 카드에 적어 50편 묶음을 수만권 찍어 무료로 배포했다. 이해인 수녀는 이를 보고 수백권씩 가져다가 수도원 등에 나눠주기도 했다. 문광자씨는 지금 시암송국민운동본부 이사장이 되어 후원하고 있다. 그의 매형으로, 정신과 상담실을 드맹에 두고 있는 이무석 전남대 의대 명예교수도 출판기념회를 할 때마다 그를 초청해 시를 낭송케 해 이 운동을 돕고 있다. 1년에 한차례씩 대가족이 모이는 수련회식의 가족모임에서도 이제 시암송이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문 대표는 그 이후 빛고을노인건강타운과 광주와이엠시에이 등에서 시암송 프로그램을 가르쳐왔다. 프랑스에서 신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던 그는 서영대학교에서 ‘헌법’이나 ‘민주정치’ 같은 교양과목을 강의하면서도 본격적인 강의 시작 전에 5분 정도씩 시를 암송해주어 학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지금은 구청과 문화원, 학교, 노인대학 등에서 강좌 초청이 많다. 그는 40대 때 월간 아동문학에 동시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지만, 자신은 시작보다는 시암송 전도사로 더욱 소명을 느끼고 있다.


2010년엔 무등산 옛길 초입 산수동의 폐가를 개조해 ‘시의 집’을 열었다. 1층엔 ‘시사랑 고백’을 붙여놓고, 골목엔 시 패널을 세워두어 등산객들이 편하게 오가며 시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얼마 전엔 한 방문객이 “마음이 많이 다친 날, 이곳에서 정호승의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를 읽고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적었다.


그에게도 상처가 있다. 프랑스에 갔지만 원하는 공부를 마치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대학에 자리잡지 못했다. 간호사를 하는 아내와 1남2녀에게도 얼굴이 서지 않았다. 그런 그를 위로하고 다시 희망을 준 것도 한 편의 시였다.


‘낟알을 다 뜯기고 만신창이로 / 들판에 버려진 지푸라기 / 그러나 새의 부리에 물리면 보금자리가 되고 / 농부의 손에 잡히면 새끼줄이 된다’


그는 지푸라기처럼 한심해 보였던 자신의 삶을 임보의 <지푸라기>를 암송하며 일으켜세웠다. 이제 그는 가장 무료하고 힘든 시간조차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채울 보물을 가슴 가득히 안고서 이를 세상에 나눠주는 부자가 되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