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아름다운 사람

같은 곳을 바라보는,가치지향점이 참 많이 닮은 사람(Me Too~)

나나수키 2017. 12. 2. 11:16

‘루저 관찰자’ 임순례의 영화 23년, ‘진 자’가 진짜라는 말

등록 :2017-12-01 20:04수정 :2017-12-02 09:12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영화감독 임순례
“저는 인간 군상을 선악 구도로 전형화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칼로 자르듯이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렇게 가르지는 않고요.” 임순례 감독은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다른 존재들에게 연민을 갖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저는 인간 군상을 선악 구도로 전형화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칼로 자르듯이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렇게 가르지는 않고요.” 임순례 감독은 관객들이 자신의 영화를 보고 다른 존재들에게 연민을 갖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세친구’ ‘와이키키’에서 ‘우생순’까지
사회적 약자와 비주류 정서에 관심
성장환경과 불교 영향 녹아들어
“인간군상 선악구도 전형화는 싫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르지 않아”

2009년부터 동물보호단체 ‘카라’ 대표
“사람 복지 뺏어 동물권 강화 아니다”
“생명존중 배려와 감수성 높아지면
인권 감수성도 덩달아 발전하고 개선”
“동물권-인권 대립시키는 건 어리석어”

이번 인터뷰는 밋밋하고 덤덤하다.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도, 청양고추처럼 맵싸한 한 방도 없다. 치열하게 각축하고 요란하게 불꽃을 튕기며 돌아가는 세상에서, 과하게 뜨겁거나 차갑거나 매콤하거나 새콤하지 않은 뭉근한 맛은 오히려 귀하다. 매 순간 사생결단하고 내달리는 일상, 비수 같은 말의 홍수 속에 기진맥진할 때, 뜨듯한 숭늉처럼 속을 풀어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났다. 지난 22일 서울 성수동의 한 사무실 앞에서 그가 빙긋이 웃음 띤 얼굴로 천천히 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그와 초면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덥수룩한 짧은 머리, 헐렁한 검정 재킷에 검은 운동화를 신은 임순례(57) 감독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옆집 언니처럼 친근하고 심상했다.

임순례는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 양 측면에서 모두 기량을 인정받는 대한민국의 대표 영화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94년 데뷔작 <우중산책>이 서울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2002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을, 2008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2009년 이후 지금까지 동물보호단체 ‘카라’(KARA·Korea Animal Rights Advocates)의 대표를 맡아, 우리 사회에 생소하던 동물권 보호 운동을 확산시킨 열혈 활동가이기도 하다. 거대자본과 화려한 스타덤이 지배하는 영화계에서나, 치열한 시민운동의 한가운데에서나, 그는 수더분한 촌부처럼 한결같아 보인다. 그 듬직함과 담담함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속에 있으나 명리에 물들지 않고, 자연에 있으나 세상사를 외면하지 않는 그의 한결같음이 나는 궁금하고 경이로웠다. 네 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그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조로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과 영화와 생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 심박동도 그의 말투에 맞춰 느긋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주파수에 기대어, 온갖 부대끼던 것들로부터 잠시 놓여난 듯 고즈넉한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임순례 감독의 ‘패션’에는 변화가 생겼다. 벌이 검은색을 보면 산짐승으로 알고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소릴 듣고 이제 마당에 나가 일할 때는 평소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옷 대신 밝은색 옷을 걸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근 들어 임순례 감독의 ‘패션’에는 변화가 생겼다. 벌이 검은색을 보면 산짐승으로 알고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소릴 듣고 이제 마당에 나가 일할 때는 평소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옷 대신 밝은색 옷을 걸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트레이드마크’ 블랙패션 고집하지 않게 된 이유

―집이 양평이시죠? 서울엔 자주 나오시나요?

“2005년부터 거기서 사는데, 처음엔 일주일에 두세번만 서울 나오면 되겠지 했어요. 그때까지는 영화 만드는 간격이 길었거든요. <세 친구>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까지 4년 걸렸고, 와이키키에서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8년 걸렸으니까. 근데 우생순이 어느 정도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영화를 이전보다 자주 만들게 되고, 2009년부터 ‘카라’를 맡게 되면서 서울 나올 일이 부쩍 많아졌어요. 지금은 주중엔 거의 매일 나오고요. 주말에도 나오는 경우가 왕왕 있어요.”

―최근에 <리틀 포레스트> 촬영을 끝내고 후반 작업이라고요.

“편집 작업하고 있어요. 내년 2월쯤 개봉해요.”

―일본 원작이라던데, 어떤 영화예요?

“일본 만화가 원작인데, 한 젊은 여자가 시골에 들어가서 사시사철 집 주변에서 나는 작물을 가지고 요리 해먹는 이야기, 그러면서 서서히 마을의 일원이 되는 얘기예요. 만화로는 사실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그걸 일본에서 두 계절씩 묶어서 1, 2편 영화로 개봉하면서 2013년에 한국에도 소개가 되었죠.”

―그걸 보셨나요?

“제가 감독한 <제보자>의 제작자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에 우연찮게 그 영화를 보고 굉장히 힐링을 받았다면서 저한테 감독 제안을 했어요. 내가 양평에 살고 있으니 그런 자연주의적인 시골 생활을 잘 알 거라면서요. 사실 요즘 자극적인 영화들이 많잖아요. 뭔가를 부수고 때리고 죽이고…. 그래서 저도 사람들한테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나 힐링의 지혜를 주는 작은 영화를 해보고 싶단 생각이 있었어요. 영화에 사계절을 다 담아야 해서 지난겨울부터 이번 가을까지 촬영에만 고스란히 1년을 들였어요. 내년에 개봉하는 거니까 영화 기획부터 개봉까지 햇수로 한 3년 정도 걸리는 긴 프로젝트죠.”

―대작이네요.(웃음)

“대작이죠.”(웃음)

―사계절이 다 담긴다는 게 이 영화의 중요한 포맷인 거 같은데 사실 도시 사람들은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잘 모르고, 그저 아침에 추우면 외투 입고 더우면 벗고 하는 그 정도거든요. 감독님처럼 시골에 살면 사계절의 변화라고 하는 게 정말 체감이 되나요?

“그럼요. 몸으로 느끼죠. 절기가 정말 절묘하다는 걸 시골 살면서 느껴요. 마당에 잔디가 있는데 ‘풀 뽑고 돌아서면 또 자란다’는 옛말 그대로예요. 어제 뽑았는데 자고 나면 또 이만큼 올라와 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처서가 지나면 풀이 잘 안 자라요. 처서, 상강, 우수, 경칩, 하지, 동지, 이런 절기들이 농사짓는 데 얼마나 절묘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지 굉장히 신기하죠.”

―직접 텃밭도 하세요?

“텃밭은 늘 하죠. 제대로 된 농사가 아니고 형편껏 흉내만 내는 거라서 농사짓는 분들이 보면 우습겠지만.(웃음)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호박…. 가을엔 김장배추도 심어요.”

―그 배추로 직접 김장을 하세요?

“뽑아서 저희 본가에 가져다주고 김치를 얻어 오죠.”(웃음)

―원료를 공급하고 완제품을 받아 오는군요.

“김장배추는 8월말 9월초에 심어야 하는데, 마침 그때 제게 바쁜 일이 생겨서 좀 늦게 심었다가 망했어요. 채 자라지도 못한 채로 얼어버리는 거죠.”

―저도 잠시 주말농사를 해봤는데 일주일 늦게 심으면 일주일 늦게 수확되는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내내 비리비리하다가 죽죠. 농사는 약속을 미룰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맞아요. 그래서 농사짓는 분들이 융통성이 없다 할 정도로 절기에 딱딱 맞춰서 일하는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신체 리듬에도 변화가 생겨요. 시골로 이사 간 뒤,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아침 일찍 깨게 돼요.”

―영화 하는 분들은 보통 밤늦게까지 일하고 늦게 일어나는 편 아닌가요?

“그렇죠. 야행성이죠. 아침에 제가 문자 주고받을 수 있는 분들은 다 스님들뿐이에요. 새벽 다섯시고 여섯시고 카톡 보내시는 분들.”(웃음)

양평에서 서울을 오가는 생활이 고단하지만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지난해 벌 알레르기로 호흡곤란까지 가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패션’에 변화가 생겼다. 벌이 검은색을 보면 산짐승으로 알고 공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소릴 듣고 이제 마당에 나가 일할 때는 평소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옷 대신 밝은색 옷을 걸친다. 임순례는 자연의 색깔과 냄새를 자신에게 한 겹 한 겹 덧입히는 중이다.

인천 변두리 동네서 태어나고 자라
노가다·일용직 모여 살던 ‘공동체’
5대조가 ‘박해’당했던 천주교 집안
나이 들어 불교적 세계관에 쏠려
존재와 존재 사이엔 차별 없다

고2 때 집에 TV 들어온 황폐한 환경
도서관 파묻혀 지적 허기 달래기도
고3 때 자퇴, 2년간 만화·소설 탐독
대학 때 프랑스문화원 영화 본 뒤
“영화라면 내가 끝까지 할 수 있겠다”

못나고 사랑스러운 루저들의 추억

―임순례 영화를 두루 좋아하지만, 그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감독의 영화적 개성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친구>나 <와이키키 브라더스> 같은 비주류 아웃사이더들의 얘기가 있는가 하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리틀 포레스트> 같은 자연주의적이고 관조적인 작품이 있고, <우생순>처럼 대중성 높은 인간 승리 스토리나 <제보자> 같은 사회 고발 영화도 있어요. 장르나 소재는 다양하지만 그래도 그걸 관통하는 임순례표 영화의 특징은 뭘까요?

“글쎄요. 이건 영화평론가가 해야 될 얘기인데.(웃음) 기본적으로 저는 사회적 약자나 비주류적인 정서에 관심이 있고, 동물이나 자연친화적인 것에 두루 관심이 있는 편이어서 인간 군상을 선악 구도로 전형화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칼로 자르듯이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렇게 가르지는 않고요.”

―영화 <제보자>에서 이장한 박사가 전형적인 악인으로 그려지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군요. ‘너무 멀리 와서 멈출 수 없다’는 대사가 공감과 연민을 자아냈어요. 악인이라기보단 어리석거나 용기가 없어서 파멸을 자초하는 불쌍한 인간으로 보이죠.

“그 사람도 누군가에겐 다정한 아버지이고 친구일 수 있으니까요. 극단적인 미움에 매몰되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감독님의 약력으로만 보면 한양대 영문과 졸업, 파리8대학 영화학 석사. 번듯하고 화려한 스펙인데, 작품마다 사회적 약자나 루저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짙게 투사될 수 있는 비결이 뭐죠?

“두가지인 것 같아요. 제 성장환경과 불교. 어려서 인천의 변두리, 거의 농촌에 가까운 동네에서 살았어요. 인천 토박이들이 아니라 인천에 돈 벌려고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굉장히 가난한 동네였죠. 저희 아버지는 부평 미군부대 노무자였고, 대부분 그런 노가다, 일용노동자들로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어요. 아버지들은 맨날 술 드시고 가정에서 폭력 쓰고, 엄마랑 아이들은 그런 폭력에 늘 불안해하고.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끼리 모여서 사니까 정도 많았고요. 제가 두살 터울로 5남매 중 막내였는데 우리 집에 세 사는 집 형제가 또 두살 터울로 5남매였죠. 우리하고 한살씩 엇갈려가면서.”(웃음)

―그럼 연년생으로 줄줄이 열명?

“작은 고아원이라고 해야 되나?(웃음) 고만고만한 애들이 열명 있고 같은 동네 사는 사촌들이 또 열명이 넘고 했으니까. 굉장한 공동체였죠. 가난하고 평범하고 어리석고 부족하지만 비슷한 이들끼리 얽혀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애정이 형성된 부분이 있어요.”

―또 하나는, 불교라고요?

“네. 우리 집이 원래 천주교 집안이에요. 5대조 할아버지부터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보령에서 서산 해미로 숨어들어갈 만큼 믿음이 강해서 집안에 수녀님, 신부님도 많고요. 저도 중학교까진 성당을 다녔는데 나이 들면서 불교적인 세계관에 끌리게 되었죠. 존재와 존재 사이에 차별이 없고, 잘났건 못났건, 인간이든 동물이든 차별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영화에서 평범한 군상에 주목하는 건 그런 불교적인 세계관하고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난한 달동네 출신이어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 가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제가 큰 성공을 거둔 적도 없지만 만약에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하더라도 그런 데는 좀 둔감한 캐릭터라서…. 성공이나 좌절에 크게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더구나 시골에서, 자연 속에서 살다 보니 그런가, 세속적인 부침에 별로 영향을 안 받는 편이죠.”

―불우한 환경에서 깊은 열등감을 갖고 성장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인정욕구나 과시욕에 사로잡히기 쉬운데, 그런 태산 같은 자존감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내가 태생적으로 둔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웃음) 잘되는 것도 물거품 같은 거고, 못되는 것도 다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해요. 좋은 일에도 마가 끼고, 나쁜 일에도 교훈이 있어요. 모든 일엔 다 이면이 있으니까요.”

임순례 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성수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임순례 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성수동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호사다마, 새옹지마의 인생

모든 일엔 이면이 있다. 그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자식 교육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특별한 지원이 없는 대신 특별한 간섭도 없었다. 무던한 부모와 형제들은 임순례가 무엇을 결심하든, 무엇을 선택하든 만류하지 않았고 그가 아무 계획 없이 무위도식할 때에도 성화를 부리지 않았다. 집 안에 동화책은 한 권도 없고, 고2 때 처음 티브이를 들여놓을 만큼 지적, 문화적으로 황폐한 환경이었지만, 그런 지적 허기 덕에 중학교 도서관에 즐비한 책을 보는 순간 임순례는 보물창고라도 발견한 듯이 무서운 집중력으로 책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엔 이면이 있다. 수업시간에도 소설책만 읽는 통에 임순례의 고등학교 학업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져서 고3 때는 360명 중에 353등이 되었고, 도저히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 취업반에 가서 미용이나 타자를 배우기도 싫었던 그는 결국 고3 때 학교를 자퇴하고 나와버렸다. 그때도 부모는 그를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지금이야 홈스쿨링하는 학생도 많고 탈학교 청소년 프로그램도 많이 생겼지만, 그때만 해도 학비가 없어 그만두거나 사고를 쳐서 잘리는 경우를 제외하곤 고등학생이 자퇴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더구나 여고생이 자퇴를 한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일이었는데요.

“제가 성격이 조용하고 잘 순응하는 편인데 뭔가 억압이 쌓이면 갑자기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때그때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참을 수 있는 만큼 쭉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싶으면, 나름의 결심을 하고, 또 그건 무슨 일이 생겨도 관철시키고 마는. 고3 되니까 입시를 위한 전시체제가 되는데, 지각을 해도, 떠들어도, 준비물을 안 챙겨 가도 학교에서 듣는 말은 딱 한 가지예요. ‘너, 그래서 대학 가겠니?’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 분위기에 반발심이 쌓인데다가 3학년 첫 시험에서 353등을 했으니….”(웃음)

―그래서 자퇴하곤 이를 갈고 공부했나요?

“처음엔 그러려고 했죠. 계획표도 짜고. 근데 아무도 통제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공부가 안 되죠. 집에서 2년 동안 뒹굴뒹굴 놀고먹으면서 소설책, 만화책만 봤어요. 그때 찐 살이 아직 안 빠진 거예요.”(웃음)

―참 막막했겠어요.

“아뇨. 그 생활이 딱 적성에 맞더라고요.(웃음) 한평생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친구들은 대학교 2학년 올라가는데 전 아무 위기의식도 없었어요. 아, 이렇게 평생 살면 너무 행복하겠다!”

―근데 대학엔 왜 갔어요?

“‘이 생활이 정말 행복한데 평생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니 돈을 벌어야 할 텐데, 고교 중퇴 학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한 거죠. 내가 학교도 다니기 싫어한 사람인데 공장엔 열심히 다닐 수 있을까? 그래서 좀 시간 여유 있고 나은 직장 다니려면 취직 잘되는 영문과를 가야겠다 생각했어요. 취직하려고 대학 간 거죠.”

그동안 쌓아둔 독서력 덕분인지 머리가 좋은 덕인지, 바라던 대로 1981년 한양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정작 영문과 졸업생으로 취직자리를 구해야 할 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대학 3학년 때 프랑스문화원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면서부터 매료된 새로운 세계. 임순례는 취직자리를 구하는 대신 한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결정도 부모님 상관없이 혼자 내린 건가요?

“네. 제가 고등학교를 그만둬봤잖아요. 지금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영화인데, 현실과 타협해서 취직한다 해도 끝까지 지속은 못할 것 같더라고요. 고등학교 그만두고 나오듯이 중도에 그만두고 나와서 진로를 바꾸지 않을까. 반면에 영화는 앞이 안 보이지만 내가 끝까지 할 수 있는 일 같았고요. 고등학교 자퇴하고 2년을 허송세월한 덕에 인생의 또 다른 허송세월을 막을 수 있었죠.”

모든 일엔 이면이 있다. 그렇게 호기 부리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임순례는 크게 낙담했다. 영화 관련 대학원 과정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한 시기였다. 학생도 적고, 수강할 수 있는 과목의 선택 범위도 적고, 무엇보다도 원서 교재에 나오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책으로만 보는 영화 공부가 무슨 소용이람? 이렇게 공부할 바엔 파리에 가서 영화나 실컷 보고 오리라! 88년 프랑스로 떠나 92년 돌아올 때까지 그는 1천여편의 영화를 봤다. 맘껏 영화를 보기 위해선 학교에 적을 둬야 했고, 학교에 다니기 위해 ‘학위는 곁다리로’ 했다. 파리8대학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메가폰을 잡고 94년 데뷔작 <우중산책>을 내놨고 이 작품으로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 대상 및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다. 역시 모든 일엔 이면이 있다.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연민

―지금까지 들려주신 10대, 20대 인생 얘기에서 연애 얘기는 한 번도 안 나옵니다.

“연애를 안 했으니까요.”

―20대에 연애를 한 번도 안 했다고요? 짝사랑도 안 했어요?

“원래 관심이 없어요. 내가 6~7살 때 옆방 친구랑 수돗가에서 하던 얘기를 부모님이 기억하고 나중에 들려줬는데요. 그 친구가 ‘난 커서 ○○이랑 결혼할 거야’ 하니까 내가 ‘난 커서 결혼 안 할 거야’ 그랬대요.(웃음)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봐요.”

―전생에 스님이셨나 봐요.(웃음)

“그랬을 수도 있고.(웃음) 제겐 기본적으로 관계의 불안정성, 불연속성에 대한 생각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견고한 관계도, 부모 자식 관계든, 친구 관계든, 연인 관계든, 언젠가는 변하고 깨질 것이란 생각. 관계에 항상성이 없다는 생각이 늘 있어서인가, 연애 같은 데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소시민들은 피곤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선남선녀가 나오는 달달한 로맨스로 판타지를 충족시키거나, 터뜨리고 추격전 하는 액션물로 스트레스를 풀곤 합니다. 임순례 영화에선 상당히 절제되는 요소들 아닌가요? 관객들이 감독님 영화를 보고 어떤 걸 얻었으면 좋겠습니까?

“예전에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피드백이 한참 있다가 오는데 와이키키 감상평 중에 누군가 이런 의견을 올린 걸 봤습니다. ‘와이키키를 보고 나서 지하철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들, 청소하는 미화원들, 먹이를 찾아서 길거리를 헤매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됐다’고요. 제가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받고 싶은 피드백은 아마 이런 종류일 것 같아요. 관객들이 제 영화를 보고서, 나와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연민을 갖거나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애초에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생각은 그런 거예요.”

모든 생명은 순환한다

‘나와 다른 존재, 다른 생명들에 대한 연민과 이해.’ 영화감독 임순례가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대표로서 하고 있는 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카라는 반려동물, 야생동물 보호문제와 함께 개 식용 반대, 동물실험 반대, 동물쇼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특히 최근 살충제 계란이나 구제역, 조류독감 등과 같은 공장형 축산의 문제가 터지면서 카라에서 제기하는 동물복지에 대한 이슈가 크게 부각된 바 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는 이상 동물을 키워서 먹을 수밖에 없는데, 먹기 위해 키우는 동물에게 복지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뭐라시겠어요?

“동물이 6개월을 살든 1년을 살든 살아있는 동안 생명으로서 최소한의 대우를 하자는 거죠. 깨끗한 물과 음식, 적절한 치료, 그리고 동물 본연의 본성이라는 게 있거든요. 닭은 모래목욕을 해야 되고 횃대에 앉아야 되고 깃털을 골라야 돼요. 이게 조류의 기본 습성인데 그게 다 차단되어 있잖아요. 돼지도 움직일 공간이 있어야 되는데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밀집식 공장 축산을 하면서 유전자변형 옥수수 같은 걸 먹이고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투여하고 그게 결국 사람한테 돌아오는 거잖아요. 유럽연합은 이미 화장품 동물실험을 금지하고, 배터리 케이지(양계용 철제감금틀)나 돼지를 가두는 스톨을 철폐하는 법을 제정했고요. 인도 같은 나라에서도 야생동물쇼를 법으로 금지했어요.”

―이런 얘기 나올 때마다 ‘동물이 인간보다 중하냐?’ 동물복지보다 농축산인들의 생업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복지를 뺏어다가 동물권을 강화하는 게 아니죠. 생명 존중에 대한 배려나 감수성이 상승하면 인권 감수성도 더 발전하고 개선될 수 있어요. 동물권과 인권을 대립시키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죠.”

―요즘 젊은 세대는 동물권에 대해 이전 세대와는 달리 굉장히 진일보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게 80년대 초중반부터잖아요. 이 80년대 세대들이 처음으로 반려동물을 집 안으로 들이고 자란 거예요. 바깥에서 따로 키우는 게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 된 거죠. 24시간 같이 먹고 자고 교감을 하니까. 그 세대가 저희 카라뿐 아니라 모든 동물단체 회원들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 세대가 사회 주도층이 되면 확실히 문화는 많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죠.”

―모든 동물에겐 그 본연의 본성이 있다고 하셨죠? 인간 본연의 본성은 뭘까요?

“새면 새, 돼지면 돼지가 오랜 시간 살아온 본연의 습성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그런 본연의 것들이 있죠. 불교에선 그걸 자비와 지혜라고 봐요. 인간 본연의 습성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살면서 나와 타인의 구별 없이 뭔가를 베푸는 자비, 그리고 깨달음을 위해 지혜로워지는 것. 그게 인간 본연의 욕구이고 그걸 지키며 사는 게 인간의 존엄과 품격 아닌가 싶어요.”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순환한다는 믿음. 모든 살아 숨 쉬는 존재에 대한 경배와 연민. 그 너르고 큰 자연의 섭리 안에서 소소한 행운과 불운에 덤덤해지는 데에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단호함의 색깔이 꼭 날카롭고 무거운 것이 아니고,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울 수 있다는 걸 난 임순례 감독을 통해 본 듯하다.

녹취 심지연


■ 임순례를 만든 시간들

8살 무렵. 돈 벌려고 타지에서 몰려든 노가다·일용직들이 모여 사는 인천 변두리 동네에서 자랐다.
8살 무렵. 돈 벌려고 타지에서 몰려든 노가다·일용직들이 모여 사는 인천 변두리 동네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교정에서. 맨 오른쪽이 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교정에서. 맨 오른쪽이 나.

고3 때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댈 때.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2년간 만화책·소설책에 빠져 살았다.
고3 때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빈둥댈 때.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2년간 만화책·소설책에 빠져 살았다.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 영화나 실컷 보고 오자며 찾아간 파리에서 약 4년간 1천여편의 영화를 봤다.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 영화나 실컷 보고 오자며 찾아간 파리에서 약 4년간 1천여편의 영화를 봤다.

1999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며 영화인들이 삭발했을 때 동참했다.
1999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며 영화인들이 삭발했을 때 동참했다.

카라의 ‘아람품’ 입양카페에서. 생명 존중에 대한 감수성은 인권 감수성과도 연결된다고 믿는다.
카라의 ‘아람품’ 입양카페에서. 생명 존중에 대한 감수성은 인권 감수성과도 연결된다고 믿는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21687.html?_fr=mt2#csidx8a85a25a73ca215a18453cca851e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