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모여 요리하고 먹는 것은 휘게 라이프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진은 요리블로거 제이디의 요리교실. 제이디 제공(jdlifestyle.com)
잠시 상상을 해보자. 당신은 연말을 맞아 휴가를 내고, 산속 통나무집에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당신과 친구들은 이미 등산을 하고 와 온몸이 노곤한 상태다.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지만, 벽난로 앞에 둘러앉은 당신은 따뜻하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라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와인을 홀짝이는 소리, 보글보글 음식이 끓고 있는 소리뿐이다. 어떤가. 편안하고 안락하고 여유롭지 않은가.
덴마크에선 이런 소박하고 평온한 느낌,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은 행복한 느낌을 ‘휘게’라고 부른다. 덴마크는 올해를 비롯해 여러 차례 유엔 ‘행복보고서’의 국민행복지수 세계 1위를 차지한 나라다. 휘게는 이곳에서 일상적인 인사말로 쓰인다고 한다. “집이 참 휘게하네요”, “오늘 우리 집에서 휘겔리한 시간을 보내요” 따위로 말이다. 연인과 소파에 누워 서로 끌어안고 있을 때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휘게에 포함된다. 대체로 돈이 별로 들지 않아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혼자일 때보다 함께할 때 행복이 증폭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혼밥’, ‘혼술’ 경향과는 다른 방향인 셈이다.
이 휘게는 덴마크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있는 주요한 배경으로 꼽힌다. 부유하고 수준 높은 복지국가로 꼽히는 북유럽 국가들 가운데서도 유독 덴마크의 행복지수가 1위인 이유가 바로 휘게다. 덴마크인에게 휘게는, 최대한 현재의 행복을 즐기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방법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과 함께 보내는 사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돈과 명예·성공보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는 문화가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안락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휘게’돈·성공보다 휘게 중시하는 문화 속적극적으로 만족감·유대감 추구해덴마크를 국민행복지수 1위로 이 때문에 휘게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져도 불행한 이가 점점 늘어가는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몇 년 전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이 단어는, 지난 7월 덴마크 행복연구소 최고경영자 마이크 비킹의 책 <휘게 라이프>가 나온 뒤 전세계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난달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올해의 단어 후보에 휘게를 올리기도 했다.
덴마크식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서 열린 ‘홈·테이블데코페어’의 덴마크 가구 디자이너 핀율 기획전. 이정국 기자
한국에서도 휘게 라이프를 추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북유럽 열풍에 올라타 인테리어·침구 업계 등에서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있지만, 휘게 라이프는 단순히 ‘어두운 조명, 작은 식탁과 따뜻한 차 한 잔, 책 한 권과 초’가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나 스쳐가는 순간에서 삶의 평온함을 포착하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려는 적극적인 행동이자 노력이다.
요리 블로거로 잘 알려진 제이디(본명 이민정·34)는 여행하면서 접한 요리교실이 좋아 아예 본인이 직접 요리교실을 열게 됐다. 2013년 그리스 산토리니로 여행을 갔을 때 우연히 한 요리교실에 참여했는데 진행 방식이 한국과는 달랐다. 강사가 설명하면 수강생이 따라 하는 강습이 아닌, 참가자 모두가 식재료와 음식, 식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조리한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방식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색적 여행 경험으로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귀국하면 언젠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요리 체험 강좌를 열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오랜 준비 끝에 지난 8월 드디어 꿈을 이뤘다. 한 달에 한두 차례 진행하는 요리교실에선 15명 정도가 모여 세계 각국의 요리를 함께 만들어 먹고 즐긴다. 누구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보다 모임 자체가 행복이다. 제이디는 “요리교실을 마치고 함께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인연을 맺어가는 것을 보면 너무 행복하다. 한 번 온 사람들은 꾸준하게 참석한다”고 말했다.
직장을 관두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린 박만규씨의 가족. 박만규씨 제공
돈에 집착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즐기려 애쓰는 이도 많다. 박만규(37)씨는 지난 7월 직장을 관뒀다. 외식 업체에서 일했던 그는 신메뉴가 개발되면 계속해서 시식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일을 맡은 지 6개월 만에 몸무게가 8㎏ 불어나고 목디스크가 악화되는 등 건강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밤 10시가 넘어 들어가는 날이 잦아지면서 7살, 4살 두 아이가 아빠를 잘 몰라볼 정도가 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 아빠로서의 책임감, 구직의 두려움 등에도 눈을 질끈 감고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둔 그는, 얻은 시간을 오롯이 가족과 보냈다. 캠핑과 여행은 일상이 됐다. 아이들에게 웃음이 돌아왔다. “캠핑 가면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 그 모습만 봐도 흐뭇해요. 그동안 왜 그렇게 회사에만 매달려 살았나 싶기도 해요. 캠핑에 돈이 들긴 하지만, 별로 큰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가족들과 지내며 얻는 행복감엔 아무것도 비할 바가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 다시 취업을 한 뒤에도 그는 주말이면 무조건 아이들과 집 밖으로 나간다고 했다. 그는 이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일하는’ 덴마크식 휘게 라이프를 살고 있다.
왜 사람들은 휘게 라이프를 추구하는 것일까. 물질을 통한 성공이 어려워지게 된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승원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취업, 결혼, 집 장만 등이 갈수록 불가능한 미션처럼 되어가는 상황이 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사회의 강요 때문에 억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외부세계에서 부여하는 물질적 ‘성공’보다는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찾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휘게 라이프’ 십계명
1. 조명은 좀 어둡게: 천장 등을 끄고 스탠드 등만 켜보자.
2. 현재에 충실하자: 스마트폰을 끄고 앞사람을 보자.
3. 달콤한 음식: 살찐다고 고민하지 말자.
4. 평등: 나 혼자 말고, 여럿이 함께하자.
5. 감사: 오늘이 인생 최고의 날이다.
6. 조화: 세상에 경쟁만 있는 건 아니다.
7. 편암함: 두 발 뻗고 누워라!
8. 휴전: 괜한 정치 이야기로 싸우지 마라.
9. 화목: “거기 기억나?” 추억을 이야기하자.
10. 보금자리: 집은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다.
출처 <휘게 라이프>(위즈덤하우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