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인터뷰

소설가 조정래

나나수키 2012. 10. 14. 23:45

등록 : 2012.09.02 19:15 수정 : 2012.09.03 15:52

조국의 만남 소설가 조정래
“박원순·안철수 뜨는 건 우연 아냐…국민이 선택하고 시대가 부르는 것”

소설가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을 만났다. 몸에 밴 강직과 절제, 그리고 여전히 청청한 기운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았고, 인터뷰 후 막걸리를 마시며 부인 김초혜 시인과의 열렬한 연애 비화를 들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두 손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했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2010년 ‘허수아비춤’에서 그렸듯
경제 민주화 안되면 국민의 삶 위험
행복지수도 꼴찌…‘묻지마 살인’ 불러
재벌 해결 못하면 한국 가망 없어

-책 제목인 ‘황홀한 글 감옥’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이, 온몸과 마음을 다 바쳐 글을 써오셨습니다. 여태껏 총 8만매가량 되는 엄청난 양의 원고를 쓰셨지요. ‘글 감옥’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며, 그 ‘감옥’은 어째서 황홀합니까?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나 호랑이도 사냥할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노루 새끼 한 마리도 쉽게 잡히지 않는 게 삶이죠. 작가는 지쳐 있거나 무관심한 영혼들을 흔들어 깨우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려면 보통사람의 평균 노동시간 8시간보다는 더 많이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필에 들어가면 하루 12시간 이상, 더러는 18시간씩 노동을 합니다. 그래서 동료·후배 작가들이 날 ‘도깨비’라고 부르더군요.(웃음) 앞으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렇게 살 것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자기규율과 제어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건 감옥이죠. 스스로 간수와 죄인 노릇을 하는 감옥입니다. 그런데 글이 잘 안될 때 몸부림치다시피 해서 스스로를 이겨내 쓰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쓰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때 “아, 정말 잘 썼다” 하고 스스로 감탄해요.(웃음) 그때의 황홀경은 도 닦는 사람들이 느낀다는 ‘득도의 황홀함’과 같을 겁니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한다는 선입견이 보통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구도승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천재는 따로 없어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천재입니다. 첫째,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무한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둘째, 끝없이 노력하는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 저는 타고난 재능보다는 노력을 믿으려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 없는 재능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과 같다.’”

-동국대 국문과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시 동국대 국문과는 한양대 공대, 홍익대 미대 등과 함께 그 자체로 유명하고 좋은 과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각 대학 학과의 특장은 없어지고 대학 간판만 남게 되었습니다. 피라미드처럼 서열화된 대학의 모습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의 작가 조정래씨가 지난 29일 오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9층 옥상정원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대학은 개성이 있어야 제대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국가적, 사회적으로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체제 아래에서는 창의성 있는 많은 사람들은 공부 못하는 ‘삼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말아요. 대학 서열에 목을 매고 사생결단하는 학부모, 그리고 그런 서열화를 막지 못하는 교육 제도, 양쪽에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처럼 대학별로 유명한 학과가 있고, 학생들이 그 학과를 찾아 부산도 가고 광주도 가는 식으로 돌아가야 교육도 국가도 살아납니다.”

-당시 동국대 국문과에는 양주동, 조연현, 서정주 등 문학 다방면에서 최고의 선생님들이 계셨죠. 전국의 문학청년들이 다 가려 했던 학과였을 텐데, 입학 후 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입학 전 시인 서정주가 죽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폭소) 원래 유명한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저런 분들에게 수업을 받는구나 하는 긍지가 있었죠. 더 놀라운 것은 재학생 중에 이미 등단한 문인이 7~8명이나 있는 거예요.”

-부인 김초혜 시인이 바로 그런 분이셨지요.(웃음)

“주눅 들면서도 ‘나도 저 길을 가야 할 텐데’ 하는 긴장이 있었어요. 국문과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작품 써서 돌려보고 평가하여 치열하고 보람 있는 4년을 보냈죠. 대학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 신문에 글을 쓰면서, ‘내 인생이 4년 단위로 이렇게 바뀔 수 있다면 나는 40년 뒤에 엄청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썼어요.”

-자기예언이 성취되셨군요.(웃음) 우리 대학 체제가 바뀌어 대학생들이 청년 조정래와 같은 대학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만 20년에 걸쳐 완성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3부작은 한국 문단의 기념비적 저작입니다. 이 3부작은 선생님께 무엇이었는지요?

박근혜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
5·16쿠데타와 장준하 타살 의혹 등
‘끝난 일’로 치부해버려 딱하고 우울
그런 사고방식으로 대통령 되면 곤란

“중고등학교 때부터 ‘사회생활’이라는 과목을 좋아했어요. 우리 사회와 역사를 알게 되면서 난 왜 이렇게 조그만 나라, 비참한 역사를 가진 땅에 태어났을까 생각했어요. 대학 들어가면서 구체화되고, 작가가 되면서 더 구체화되었고. 우리 민족의 고난에 찬 삶과 역사를 쓰지 않으면 이 땅의 작가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민족 분단으로 진실을 쓰지 못하게 막는 정치적 압박도 있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기필코 써야 한다 생각했어요.”

-<태백산맥> 집필을 1983년에 시작하셨습니다. 광주의 피 냄새가 채 가시지 않았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이 기승을 부릴 때 아닙니까.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태백산맥>을 정치적 민주화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쓰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외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다고 할 때, 저는 아내에게 광주에 가보자고 했어요.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들도 결석시키고 데려갔어요. 새벽 6시 금남로 뒤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갔는데, 벽면에 있는 총탄자국을 350개까지 세다가 포기했어요. 어릴 때 겪었던 여순사건 때보다 더 처참하고 잔혹했어요. 실제 더 많은 사람이 죽었고. 돌아오면서 도대체 이 땅의 작가로서 뭘 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이러한 비극의 뿌리인 분단 문제를 정면으로 쓰지 않으면 작가로서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당시는 체제의 폭압이 너무 심해서 학생운동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던 때였어요. 2회분을 써놓고 집사람에게 말했어요. ‘내가 계속 써나가면 반드시 정치적 위해를 당한다. 그때 애 데리고 견딜 수 있겠느냐?’ 집사람이 한참 가만히 있더니, ‘작가가 쓰고 싶은 걸 쓰다가 당하는 일이라면 관계없다, 견딜 수 있으니 쓰고 싶은 대로 써라’ 했죠.”

-다들 광주를 회피할 때 직접 광주를 찾아가시다니, 게다가 가족까지 다 데리고 말입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면으로 맞붙으셨습니다.

“<태백산맥> 쓰면서 정신적 고통이 심했어요. 좌익 부분을 쓰고 나면 계속 악몽에 시달려요.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두드려 맞는 꿈. 벌떡 일어나서 다시 원고 들여다보고 손질하고 했지요. 그러다 보니 심한 위궤양이 생겼어요. 위에 두 군데 천공이 났지요.”

-3부작에 등장하는 인물이 총 1200명으로 압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인물사전이 필요합니다.(웃음)

“안 그래도 출판사에서 작업중입니다.”

-이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태백산맥>의 하대치. 민중의 표상이지요. 끝없이 시대상황을 따라서 발전하고 성숙해나가는 인물이죠.”

-<태백산맥>으로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어 11년이 지난 후인 2005년에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경찰 대공분실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데, 조사받는 고통보다도 더 괴로운 것은 작품 쓰는 걸 중단하는 거였어요. <아리랑>과 <한강>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수사 때문에 일주일씩, 열흘씩 연재가 중단되는 게 작가로서 비통하더군요. 우리 조국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서 더 써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며 견뎠죠.”

-고발한 사람들은 극우성향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노무현 정부 이후에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 황당하고 기막혔습니다. 민주정부 형사정책의 수치입니다. 현 시국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2007년 이명박 집권을 예견하시면서, ‘민주화세력 집권 15년이 정치 무능으로 실패했고, 그 결과 불행히도 차기 정권은 필연적으로 보수세력이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제 이명박 정부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치하에 살아가시면서 작가로서, 시민으로서 어떠셨는지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한심스러워서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여 민주화를 이뤄놨는데, 어떻게 이렇게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을까, 4대강 사업같이 국민의 70%가 하지 말라는 일을 왜 이렇게 몰아붙일까, 너무 갑갑했어요. 이명박 정권은 국민이 깜짝 놀랄 정도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통의 실패’를 함으로써 정권교체가 될 수 있는 기반을 튼튼히 만들어주었다는 점만 기여를 한 것 같아요.(웃음)”

-민주정부의 한계로 경제민주화의 비전과 방책이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뒤늦게나마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화두로 자리잡았습니다. 경제민주화란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새누리당조차도 표면적으로는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하잖습니까. 선생님께선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문제를 2010년 <허수아비춤>에서 제기하셨습니다.

“대선 정국에서 여야가 모두 경제민주화를 최대의 과제로 내세운 것은 그들이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국민들의 요구가 워낙 강력하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중반 총리가 이런 공개발언을 했습니다.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축적의 시기’라고. 언젠가 분배의 시기가 올 테니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있었기에, 국민들은 그 말을 믿고 헌신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이상의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노동을 견디며 살았지요. 지금은 국민총생산 2만달러 시대입니다. 이제 국민은 뭔가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어요.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33개국 중에 자살률이 1위입니다. 국민 행복지수는 꼴찌입니다. 사람이 살기가 너무 어려운 지옥 상황이란 겁니다. 그러니 ‘묻지마 살인’도 일어나는 겁니다. 누적된 상처가 곪아터지는 거예요. 정치인은 물론 각 분야 지식인들이 정신 차리고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부터 지금까지 역대 정권이 재벌을 너무 옹호해서, 그들이 방자해졌습니다. 이제는 정치권력을 압박할 정도로 거대한 권력이 되었고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없이는 국민의 삶과 국가의 운명이 위험해집니다.”

박·안, 삶 통해 진정성·헌신성 보여
정치적 경험없어 안된다는 건 모함
민주·진보당 ‘불협화음’은
수구세력 도와주는 역할

-강력한 대선후보인 박근혜씨는 ‘아버지는 경제성장을 이뤘고 나는 복지국가를 이루겠다’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과거 선생님은 ‘박정희가 지하에서 한 층 한 층 올라와 지상으로 나오고 있다’는 평가를 하신 적 있습니다.

“박근혜씨의 겉모습은 어머니고, 속마음은 아버지입니다. 그러기에 5·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 말하죠. 민주화 세력의 희생, 국민의 열망을 완전히 묵살하는 발언입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드러날 때에도 ‘끝난 일’이라고 정리해 버리더군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변화한 시대의 대통령이 되어선 참 곤란하죠. 그분을 바라보는 심정, 참 딱하고 우울합니다. 그리고 복지는 대통령이 하는 게 아닙니다. 복지는 국민 전체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이지 대통령이 베풀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으면 합니다.”

-야당은 과거에 비해 세력이 확대되었지만 시민에게 큰 감동을 주지는 못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다. 반면 정치권 밖에 있던 박원순씨가 서울시장이 되는 등 시민들이 정치권 바깥 인사에게 마음을 주고 있습니다.

작가는 무관심한 영혼 깨우는 일 해
하루 18시간 ‘황홀한 글 감옥’ 갇혀
현 교육제도 창의적 인간 ‘삼류’ 취급
대학별로 개성 살려야 제대로 발전

“박원순 시장이나 안철수 원장이 부상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생 삶을 통해서 진정성, 헌신성, 실천성을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에 시민들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상은 국민의 선택이고, 시대의 요구이자 역사의 부름입니다. 박원순씨가 시장이 되고 나서 아주 잘하고 있잖아요? 안 원장에 대해서 보수언론들이 정치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안된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국민을 속이는 모함입니다. 안 원장이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통령이 된다면 박 시장처럼 잘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최근 보수언론에서 안 원장의 룸살롱 출입 여부를 따지면서 공세를 폈습니다.

“그 보도를 보고 한동안 어리둥절했어요.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이죠. 안 원장이 병역기피도 안 하고, 위장전입도 안 하고, 논문표절도 안 하고, 세금포탈도 안 했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문제로 트집을 잡는 거지요. 차라리 장교로 근무할 때 사병한테 왜 존댓말을 썼느냐 하든지, 아니면 왜 트림을 하느냐 하고 따지는 게 더 낫겠지요.(웃음)”

-야권 정당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두 정당은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국민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줬습니다. 진보당이 벌인 작태를 보십시오. 국민의 실망이 말도 못합니다. 그런 작태는 수구세력 입에 밥 떠먹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차려야 합니다.”

-중국 관련해서 세 권짜리 책을 준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 소재로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국이 강성, 강대해지는 것은 21세기 전지구적인 문제입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 민족의 미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사람들이 돈을 좇아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이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정글 만리>입니다. 중국 대륙이 정글이에요. 내일부터 ‘감옥’에 들어가 내년 4월까지 꼼짝 않고 써서 완성할 겁니다.”

-작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문제 없는 인간사회는 없죠. 문제가 많을수록 작가는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해야 하고, 그 문제에 대해 정직한 발언을 해야 하고, 그 발언이 사회를 인간답게 바꿔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말했죠. ‘예술은 아름답다. 그러나 진보를 위한 예술은 더욱 아름답다.’”

정리 최원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