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첫 손 꼽히는 건축가 승효상씨. 한국에서 건축은 아직 토건에 종속되는 현실을 질타하는 그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문학적 사고라고 역설한다. 설계를 잘 하려면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아야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하려면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김태형 기자 xogud@hani.co.kr |
조국의 만남 - ‘용산미군기지 공원화 설계’ 승효상 건축가
대중적으로는 고 노무현 대통령 묘역의 설계자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부터 한국 건축을 대표하며 국제적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스펙상 엘리트 중 엘리트이지만 시대를 고민하며 ‘빈자의 미학’과 ‘불편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사람을 검도 단증과 죽도, 그리고 자전거가 놓여 있는 탐나는 서재에서 만났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정치권력과 건설권력이 야합해
대부분 신도시 물량위주로 건설
국토부, 토건 주도 ‘턴키방식’ 선호
건축, 프랑스처럼 문화부 소관돼야
-사무실 이름 ‘이로재’에 대한 질문 많이 받으셨죠?
“1992년 친구 유홍준 교수가 아버지 퇴직금으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 설계를 부탁했지요. 그래서 지은 것이 ‘수졸당’인데, 유 교수가 가진 돈이 적어 설계비도 다 줄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유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이었거든요.(웃음) 유 교수 공부방에 있던 ‘이로재’라는 200년 된 현판을 탐냈더니 설계비 대신 가져가라 하더군요.”
-두 분의 우정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왜 그 현판을 노리셨던 겁니까?
“이로재의 출처는 <소학>인데, ‘효심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아침마다 부모님께 문안드리러 가면서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이죠. 내가 갈 길을 알려주는 것 같았어요. 김수근 선생 문하에서 15년 동안 있었으니 김수근 건축밖에 몰랐는데, 이제 내 이름으로 내 건축을 해야겠다고 모색하고 있을 때 이 현판을 만난 거지요.”
-승효상 건축철학의 원형이 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부모님은 이북(평안도 정주)에서 월남하셨고, 전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났습니다. 8가구가 살던 그 집이 저의 첫 번째 공간 기억입니다. 가난에 쪼들려 살았기에 고등학교 때까지 이사를 스무 번쯤 했습니다. 최근 이사 다닌 그 집들의 평면도를 일일이 그려봤는데, 그 집들이 제 건축의 바탕이 되는 평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 ‘불편하게 살기’ 철학의 뿌리가 그 여덟 가구 집에 있었나 봅니다.
“그 집들이 불편했지만 정이 가득했어요. 그 집 마당에 우물 하나, 화장실 하나가 있었어요. 아침이면 서로 화장실 사용하느라 북새통이고, 저녁이면 서로 밥한다고 시끌시끌했지요. 불편하지만 그게 우리를 얼마나 사람답게 만들어주는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고교 시절 공부는 잘했지만 ‘불량소년’이기도 하셨다는데, 얼마나 불량했는지요.(웃음)
“중학 시절까지는 모범적 기독교 신자였는데 고교 입학 뒤 교회에서 금지하는 것을 다 했어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교회 안 가고. 친구들 꾀어 중국집 이층 방에서 술 마시고, 교회 친구들을 선동해 다대포 바닷가로 놀러 갔지요. 학교에서는 제가 그런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교회 친구들을 ‘타락’시킨 소년이 이후 교회 장로가 되셨네요.(웃음) 문재인 대통령 후보와 경남고등학교 동기시죠?
“재인이는 문과이고 저는 이과여서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어요. 재인이가 경남중을 나왔고 공부를 잘한지라 집이 부자인 주류에 속하는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더군요. 하루는 학교 담을 넘어 불량 학생들이 모이는 구덕산 속 특정 장소에 갔는데, 재인이가 오는 거예요. 깜짝 놀랐지요.(웃음)”
-서울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다음 반독재 데모를 많이 하셨다면서요?
“유신 직전 해인 1971년 대학에 들어갔는데, 입학식 다음날 휴교가 되더군요. 건축학과 2년 위에 고교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이 공과대 학생회장이었어요. 한복 입고 학교 건물 옥상에 서서 혼자서도 ‘독재 타도’를 외쳤어요. 이 선배 도와야겠다, 생각했지요. 데모할 때 항상 선봉에 섰죠. 매번 얻어터지고 붙잡히곤 했어요. 휴교하면 집에 내려갈 수도 없으니 하숙집 전전하다가 학교에 다시 등교하면 데모하고 그랬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대학교 때 건축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저도 지금은 모교 교수지만,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대학 다니면서 수업보다는 ‘딴짓’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웃음)
“2학년이 되어 들은 첫 전공수업 시간이 생각납니다. 미국 유명 대학을 나온 젊은 교수님 수업이었어요. 그런데 이분이 12품 제도기를 들어 보여주시면서 너희는 이걸 잘 다뤄야 한다, 성능은 이렇다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때 제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렸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지극히 지엽말단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울화통이 터진 거죠. 그래서 제가 ‘선생님, 이게 저희에게 할 강의라 생각하십니까’라고 항의해 버렸어요. 수업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고, 저는 이 학교 안 다닌다고 큰소리치면서 학교에 안 갔어요. 그런데 다시 휴교가 되는 바람에 학교를 거부하는 효과가 없어져버렸습니다.(웃음) 그다음부터 혼자 건축 공부 했어요. 수업은 안 들었지만 학교 제도실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한 거죠.”
용산미군기지 자연상태 복원
새 건물 안짓고 기지내 건물 활용
시대의 기억 남겨 역사 복원하고
울타리 없애 장소성 살려낼 것
-1974년 ‘공간’에 입사해서 김수근 선생 작고 후에 대표를 맡으셨습니다. 보통은 김수근의 수제자이자 후계자였기에 쉽게 성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원래 독립하려 했어요. 김수근 선생이 1986년 6월14일에 돌아가셨는데 그 한 달 전 스승의 날에 저와 다른 선배 한 분을 불러놓고 너희가 회사를 맡으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꼼짝없이 당했죠.(웃음) 대표이사가 되고 보니 그때 빚이 30억원 있었습니다. 사실 김수근 선생 작고 몇 년 전부터 저를 비롯해 많은 직원들이 월급을 제대로 못 받고 있었어요. 전두환 정권이 ‘구악’을 척결한다면서 김수근 선생 같은 대표적인 문화지식인들을 정부 발주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고 설계 당선을 방해했어요. 사채업자에게 맞아가며 3년간 회사 운영해서 빚을 많이 정리한 후, 같이 대표를 맡은 선배에게 나 좀 살려달라고 부탁해 독립했습니다.”
-김수근 선생은 왜 승 대표님을 찍어서 덤터기를 씌우셨다고 생각하십니까?(웃음)
“다른 ‘공간’ 선후배들이 제가 김수근 선생에게 가장 많이, 가장 잘 배웠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김수근 선생님의 카리스마가 싫었어요. 그래서 문하에 갈 생각이 없었는데 대학 은사가 들어가라 하는 바람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잘 배웠다는 것은 김수근 선생과 싸운 결과입니다. 도면을 한 장 그리라고 하면 두 장 그려갔고, 기획하라고 하면 다른 대안을 내고…. 철저하게 패배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어찌 보면 김수근 건축에 저도 조금 보탰다고 생각합니다. 김수근 건축의 전환점이라고 평가받는 마산성당과 경동교회 같은 작품들은 제가 주도적으로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선생님께 인정받았죠.”
-덤비는 제자가 마음에 드셨군요. 프로이트적이지만,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아들’이 마음에 들어 후계자로 인정하는 그런 과정 같기도 합니다.
“죽이고 싶었는데 결국 선생님을 죽이지 못한 거죠. 스스로 돌아가셨으니까. 김 선생 밑에서 15년 있으면서 김수근 건축에 세뇌되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익숙했지만 고통스러웠습니다. 제 어린 시절이 바탕이 되는 건축을 하고 싶었어요. 저와 김 선생이 워낙 다르기도 했고요. 김 선생은 아주 좋은 환경에서 자란 분이고, 저는 도시빈민 출신이었고. 김 선생님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면, 저는 기독교였고.”
-승효상 건축의 열쇳말이 된 ‘빈자의 미학’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서울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가면서였습니다. 동네 골목의 공간 구조가 기막히게 아름답고 모든 공동체의 공공 영역과 공공생활이 그 안에서 다 이뤄지는데, 건축이나 도시의 모든 지혜가 다 있는 거예요. 골목길을 보면 직선에 평면이 아니라 언덕 위 비탈에 있으니까 길이 가다가 휘어지고 넓어지고 높낮이가 달라지는데, 이게 공간 구조거든요. 그 구조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고 헤어지는 것을 보고 건축의 모든 것이 저기 다 있다 생각한 거죠. 달동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이 나눠 써야 하는 것이었지만, 건축적으로 해석하면 모여 사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건축공간으로 보였습니다. 가진 돈에 상관없이 우리가 나눠 쓰면 이런 공간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부자 동네라는 성북동, 평창동 사람들은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붙어 사는 것’이지요. 길거리에 사람도 잘 안 다니죠. 달동네 골목을 보며 모여 살고 나눠 쓰는 검박하고 절제된 건축미학을 실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고민과 관찰이 ‘빈자의 미학’의 바탕을 이루었네요. 근본적인 질문 드리겠습니다. 건축은 무엇입니까?
“건축이라는 단어는 일본 사람들이 만든 말입니다. ‘세울 건’과 ‘쌓을 축’ 자를 조합했는데 노동을 뜻하는 말일 뿐, 건축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어입니다. 영어에서 건축을 말하는 ‘아키텍처’는 으뜸이란 뜻의 ‘아키’와, 기술을 뜻하는 ‘텍처’가 합쳐진 말로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으뜸이 되는 큰 기술이란 뜻이죠. 건축가를 가리키는 말은 ‘아키텍트’입니다. 앞글자인 에이자를 대문자로 쓰면 조물주가 되지요. 중국 사람들은 건축을 원래 ‘영조’라고 썼습니다. ‘가꿀 영’, ‘만들 조’ 자를 합친 것이니, 그 뜻 역시 큽니다. 우리말에 가장 좋은 말이 있는데, ‘짓다’입니다. 건축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입니다. ‘지음’이란 것은 질료에 자기 사상과 이념을 넣고 기술을 사용하여 전혀 다른 물건을 만드는 것이죠. 건축은 사유의 과정을 거친 창조입니다. 건축을 부동산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장 저급한 이해지요.
건축을 조금 낫게 봐주면 공학으로 보고, 더 잘 봐주면 예술로 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다 잘못된 시각입니다. 건축의 본질은 공간, 특히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부공간은 우리가 사는 방법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공간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부공간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 가서 감동하면 그 공간에 감동한 것입니다. 이 감동을 설명하려면 그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설명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는 방법을 조직하는 것이 곧 건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설계를 잘하려면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아야 하고, 남이 사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문학이나 영화, 역사를 알아야 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왜 사는지 알아야 하니까 철학도 필요하죠. 곧 ‘문사철’이 건축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사무실 이름 ‘이로재’의 뜻은
가난한 선비의 길 상징해
돈에 상관없이 공간미 나누는
‘빈자의 미학’ 실천하고 싶어
-게리 쿠퍼가 주연한 영화 <마천루>(1949)에서 주인공 건축가는 자기 뜻과 달리 지어지는 건축물을 폭파시킵니다. 승 대표님도 그런 심정이 든 적 있었습니까?
“폭파시킬 만한 분기는 노상 갖고 있죠.(웃음)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건축가가 누구에게 봉사하느냐는 것이겠죠. 1차적으로는 건축주에게 봉사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건축주에겐 건물의 ‘사용권’이 있을 뿐 ‘소유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의 진정한 소유권은 사회와 시민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집만이 아니라 옆집이나 거리의 건물한테서도 얼마든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건축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공공성입니다. 건축주 이익만 따라 공공성을 낮춘다면 그 사람은 건축주의 시녀나 하수인일 뿐 건축가가 아니라고 봅니다. 다행히도 이 성질 나쁜 건축가를 선택해주시는 귀한 건축주 분들이 많습니다.”
1971년 대학입학해 반독재 데모
기능위주 건축강의 반발해 독학
졸업뒤 김수근선생과 싸우며 배워
건축의 가장 기본은 ‘문사철’
-‘우리나라 정부에는 건설 정책만 있고 건축 정책은 없다’고 일갈하신 적이 있지요.
“우리나라 관공서 구성을 보면 토목 하는 사람들이 도시와 건축을 지배하고 있어요. 건설회사와 야합해서 말입니다. 건축가가 낄 틈이 없어요. 신도시 대부분은 정치권력과 건설권력이 야합해서 만든 거예요. 우리나라는 건설 정책도 물량 위주였지 삶의 질을 위한 정책은 펴지 않았습니다. 국토해양부에 건축이 속해 있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프랑스처럼 문화부 산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설계와 건설을 분리하는 게 정상입니다.”
-(손뼉 치며) 건축이 문화부 소관이 된다, 멋진데요. 대선 후보들이 이런 정부조직 개편 공약을 내걸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기득권을 가진 ‘토건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겠죠?
“사람들이 저보고 한국 대표 건축가라고 하는데, 제가 우리나라 대표 건물을 설계해본 적이 없어요. 건축가와 건설사가 합쳐서 오라고 강요하는 ‘턴키방식’을 정부가 선호하기 때문이지요. 이건 마치 검사하고 변호사가 의견을 통일하여 법정에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건축가와 건설사는 자금력이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턴키로 하면 건축가가 건설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국토부는 이 방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먹이사슬이 굉장히 완강한 거죠.”
-국제 공모로 용산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바꾸는 설계 현상공모에 당선되셨습니다. 2027년 완성되던데 승 대표가 용산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기대가 큽니다.
“용산은 땅 면적이 78만평으로 여의도나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작지만, 이 두 곳보다 더 크게 느껴집니다. 200만평 남산과 연결되어 있고 한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첫째, 자연 생태를 복원할 겁니다. 몽골과 일본이 점령했고 이젠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릅니다. 둘째, 역사를 복원할 겁니다. 용산 부지 안에 건물이 1000여개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없애야겠지만, 없어지게 될 건물도 완전히 없애지 않고 기억을 남기려 합니다. 새로 짓는 건물은 없을 겁니다. 셋째, 장소성을 복원하려 합니다. 울타리로 막혔던 공간이니 울타리를 없애 서울의 한 부분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용산 공원도 끝내고 나면 무엇을 하실 건지요?
“건축가에게 은퇴 개념이 없습니다. 세계 최고령 건축가가 브라질 새 수도 브라질리아를 설계한 오스카르 니마이어입니다. 지금 105살인데, 여전히 시가 물고 연필로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제 꿈은 끝까지 그리는 것입니다. 다만 건축이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믿는 사람이기에, 사람들이 선해질 수 있는 건축을 설계하고 싶습니다.” 정리 구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