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인터뷰

이제석-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나나수키 2012. 10. 14. 23:32

등록 : 2012.07.09 08:30 수정 : 2012.07.09 16:57

 

자신의 소신대로 공익광고에 힘쓰고 있는 이제석(오른쪽)씨가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국 서울대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조국의 만남] 이제석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내 광고는 뒤집기…거인 골리앗 이긴 다윗이 역할모델”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이제석. 청소년 시기를 만화에 빠져 보내면서 성적이 나쁘다고 구박받다가 지방대 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취업에 실패하고 동네 간판장이로 일했다. 독기를 품고 편도 비행기표를 끊어 미국으로 떠나 세계적인 광고상을 휩쓸고 난 뒤 귀국해서는 메이저 광고회사들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공익광고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만 30살의 이 딱부러진 청년은 학벌, 스펙, 대기업 취업으로만 달려가도록 몰리고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전복하라”고 조언한다.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트위터 @patriamea

내 광고철학은 덜 담는 ‘레스’
단순한 얘기로 평생 여운 남게
한개 결정타로 화살처럼 꽂혀야
시각적 소통으로 인식변화 꿈꿔

-연구소 위치가 좋다.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상수동이 마음에 든다. 이 동네에서는 차 마시면 기타 치고 피리 부는 사람을 쉽게 만난다. 강남 쪽은 잘 안 간다. 강남 전체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졸부들,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설치는 게 보기 싫다. 이상하게 그곳에 가면 몸이 불편하다. 그쪽 사람과 일도 잘 안 한다. 불암동, 삼청동 같은 곳에 가면 숨이 트인다. 작은 골목이 그대로 있고, 영세자영업자가 장사하고, 문학 하는 사람들이 모여 글 쓰는 곳이 좋다.”

-<한겨레> 독자와는 2010년 한겨레 ‘나눔꽃 광고’로 만났다. 첫 회가 떡국 옆에 ‘설날 연휴에 집집마다 끓여먹는 떡국 한 그릇이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라는 카피가 있는 ‘그림의 떡’ 광고였다.

“2009년 <영남일보>에서 ‘이제석의 좋은 세상 만들기 캠페인’에서 국내 최초로 신문에 공익광고를 하기 시작했고, 전국지로는 <한겨레> 지면에서 처음 했다.”

빅이슈 코리아 광고. 사진/이제석 광고 연구소 (www.jeski.org) 제공.

-<영남일보> 2면에 실렸던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한다’는 카피가 들어간 ‘이불신문’ 광고, 간명하면서도 강렬했다. 노숙자를 위한 잡지 <빅이슈>의 한국판 표지 디자인도 만들었다. 상업광고는 하지 않는가?

“업무의 20% 정도는 상업광고를 한다. 상업광고는 영악한 테크닉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도 해야 한다. 이런 테크닉을 공익광고에도 사용할 수 있고. 비정부기구(엔지오) 활동가분들과 일을 하다 보니 교활한 면이 없어 문제더라.(웃음) 그러나 제 삶의 목표는 공익광고를 하다 죽는 거다.”

-왜 공익광고를 하는가?

“자살 예방, 학교폭력 근절, 다문화가정 차별 철폐, 장기기증 활성화, 아동 국내입양 촉구 등의 캠페인 등을 할 때 신이 난다. 상업광고 작업을 할 때와는 보람이 다르다. 통장 잔고 같은 유형자산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무형자산이다. 유형자산은 시장경제 논리에 따라 돌아가기에 한정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형자산은 무한하다. 많은 돈, 좋은 옷이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

-‘광고 천재’라고 불린다. 광고 철학은 무엇인가?

“내 광고 철학의 핵심어는 ‘레스’(less)이다. 커다란 어젠다 작업을 할 때도 화면에 쓸데없는 것을 안 집어넣는다. 어떻게 적게 얘기하고 상대방을 설득할까, 짧고 단순한 이야기로 한번 광고를 본 사람 가슴에 평생 진한 감동이나 여운으로 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나는 광고를 흥미있는 이야기, 멋진 카피 한 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이나 방송작가와 다른 광고장이의 역할이 있다. 15~30초 동안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광고장이 고유의 능력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안에 뼈가 있어서 사람들의 인식을 5도, 10도 바꾸는 것, 그것이 능력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경우 광고를 통해 사람의 눈과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문제해결에 가장 큰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인식 전환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둔다. 부엉이면 부엉이(강남경찰서 벽화 광고), 권총이면 권총(원쇼 칼리지 페스티벌 최고상 수상작 ‘굴뚝총’) 하나로 승부를 건다. 유명 모델도 쓰지 않는다. 상업광고의 경우도 하나를 만들어 여러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한다. 불필요한 제작 공정을 줄이고 홍보도 너무 많이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미국의 평화반전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젊은 광고인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순수 프로보노성 공익광고 캠페인. 사진/이제석 광고 연구소 (www.jeski.org) 제공.

-요즘 상업광고를 보면 스타 출연에 목을 매는 것 같다.

“스타를 쓰는 것은 광고장이의 책임 회피다. 진정한 광고장이는 광고의 에이(A)부터 제트(Z)까지 스스로 다 만들어야 한다. 스타 누구 하면 이미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스타의 이미지를 가져다가 제품에 끼워넣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제품의 고유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불임증 광고다. 그리고 대형 광고대행사는 실제 작업을 자기가 안 한다. 외주업체에 다 시킨다. 광고대행사 크리에이터는 훌륭한 트래픽 매니저(교통정리하는 이)에 불과하다. 외주를 주더라도 기획까지 다 맡기는 것은 문제다. 그건 영혼을 파는 거다. 그러면 수명이 오래 못 간다.”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돈지랄 광고판”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큰 것, 많은 것, 비싼 것에 집착하는 이면에는 콤플렉스가 있다. 가난뱅이 콤플렉스. 원래 부자였거나 내면이 부자인 사람은 불필요한 데 돈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하게 거창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돈을 쓰고 치장하는 행태, 버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졸부형 클라이언트와 잘 안 맞는다.”

학창시절 공부 못해 불청객 취급
존재감 못느끼고 살 동기 못찾아
내 의사 무관한 규율 싫어 반항
만화 그리는 것에 빠져 버텼다

-인터뷰 때마다 다루어 지겨운 느낌이 있겠지만 개인사 얘기 해보자.

“괜찮다. 여기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 ‘루저’였던 사람이 저기에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싶다. 나의 과거는 현재 나의 라이프스타일, 추구하는 철학과 연관이 있기도 하고.”

-중·고등학교 시절 주변의 모든 사람이 공부 잘하는 형과 비교를 했고, 선생님은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 반 평균 떨어진다”며 혼을 냈다는데….

“나보고 직업반 가라고 했다. 예체능반을 택한 뒤에도 ‘벌레’ 보듯 대했다. 학교와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정받지 못하고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야 할 동기를 찾지 못한다. 학교를 가도 학교에 필요없는 학생이었다. 공부 못한다는 이유로 불청객 취급을 받았다. 공부 못한다고 청소만 시키고…. 서울시가 만든 공익광고에서 환경미화원을 위한 표창장을 만든 것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교 규정보다 머리카락이 길어 바리캉으로 밀렸는데 다음날 그대로 등교하여 신나게 맞았다던데….(웃음)

“잘 기억나지 않는다.(웃음) 예전 친구들 만나 3차까지 가면 친구들이 내가 학창시절 했던 행동을 들려준다. 내가 정말 그런 일도 했나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웃음) 당시 규율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규율은 지키기 싫었다. 반항하고 바꾸고 싶었다.”

-고향인 대구를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학생 자살이 일어나고 있는데, 과거나 지금이나 학교 문화는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만화 그리는 것에 빠져 있었다. 매주 신작 만화를 발표했는데 반 아이들이 돌려가며 보았다. 좋아하는 거 해보라고 격려해줬던 선생님이 계셨다. 학급 친구 중에서도 그림 잘 그린다며 칭찬하고 신작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었다.”

-어떤 만화를 그렸나?

“시사적인 내용이 많았다. 선생님을 까는 내용도 많았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질투, 배신, 야망, 로맨스 등등.(웃음) 내 만화가 학교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뿌듯한 순간이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만 학교 신문에 나왔는데, 내 만화가 크게 실렸으니. 나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구나 느낄 수 있었다.”

-평점 4.5 만점에 4.47로 계명대 시각디자인과를 수석졸업했다. 그러나 번듯한 직장을 못 잡고 동네 간판장이로 일을 했다. 학벌사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당시는 학벌사회, 이런 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학교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토익 같은 것도 전혀 준비 안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했다. 졸업한 후에야 ‘아, 사회에서 요구하는 건 이게 아니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 생각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한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미국 유학을 가야 했는데 영어는 어떻게 준비했나?

“집 근처 미군부대 ‘캠프 워커’에 ‘공짜 미술수업 일대일 개인지도’ 광고를 내어 미군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영어를 배웠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할 때 한국의 어느 대학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작품으로 승부를 걸어 평가받았다. 미국에서 성공하고 돌아오니 비로소 한국에서 조명과 주목을 받았다. ‘지잡대’라는 모멸적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봤다. ‘인 서울’과 ‘지잡대’를 나누는 사고는 상대를 비하하여 자신을 올리려는 것이다. 편견의 배경이 뭔가 많이 고민해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편 가르고 급 나누는 거 좋아한다.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이 강할수록 자기와는 반대되는 그림자를 만들어 놓아 자기를 올리려는 심리가 있다. 자기가 신앙심이 없을수록 타인을 신앙심이 없다고 비난한다. 애국심이 없을수록 타인이 애국 안 한다고 깐다. 상대방을 검게 만들어 자기를 희게 보이려 하는 거다. 사실 나는 ‘지방’이라는 단어가 너무 싫다. 대구면 대구, 광주면 광주지. 어디가 중앙이고 어디가 변두리냐. 미국이나 중국에서 보기에는 우리나라가 변방 중의 변방이다.”

‘인서울·지잡대’ 등 급 나누는 건
자기에 대한 불확실성 크기 때문
지방대생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
자신감 갖고 하고 싶은 거 하라

-2010년 모교에서 강의를 했다. 후배들을 만나니 어떻던가?

“‘지잡대’ 규정에 눌려 있었다.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강연을 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은 그 사람 실제 속이 무엇인지 보지 않고 스펙만 보려 한다. 지원서도 안 받아주고.”

-지방대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감을 찾았으면 좋겠다. 어디 틀어박혀서 자기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권하고 싶다. 교수님 지도를 믿고 꾸준히 하면 당장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장독 속 묵은 장의 향처럼 실력이 우러나올 것이다.”

-그런 개인적 노력 외에 ‘학력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국외에서 인정받았지만 우리나라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떠날 때만 해도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배신감과 원망으로 가득 차서 편도 비행기를 탔다. 미국이 역사가 짧고 전통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허례허식이 없어 좋았다. 실용과 합리를 중시하는 사고가 많이 도움이 됐다. 서로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고 서로 정확히 주고받는다. 그것이 없으면 갈라선다. 쿨하고 단순한 게 좋았다. 그런데 미국 생활을 접을 무렵 한국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났다. 내가 몰랐던 부분도 있고, 오해를 했던 부분도 많았던 것 같고. 미국을 알면 알수록 미국보다는 한국에 애정이 간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자 한다.”

-자신을 버티게 해준 내면의 동력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 원해서 기뻐서 하면 천당에 있는 것처럼 효율성도 높고 즐거웠다.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지옥의 일처럼 하기 싫었다.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이 잘린 것에 대해 저항한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가를 중심에 두고 살았기에 버티고 이겨낸 것 같다.”

-작품을 보면 생각을 뒤집는 게 많다.

“내 작품에는 ‘서브버전’(subversion), 즉 뒤집는 것이 있다. 대상을 뒤집는 데서 모티브를 얻는다. 내 작품을 보면 공격성이 들어가 있다. 광고는 듣는 사람의 귀에, 보는 사람의 눈에 화살처럼 꽂혀야 한다. 메시지에 임팩트가 없으면 안 본다. 임팩트를 만들려면 집중력과 폭발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작품을 만들다 보니 유했던 성격도 변하는 것 같더라.”

-고양이를 뚱뚱하게 만들어 물개들 사이에 넣어놓은 애완동물 다이어트 사료 광고 등의 경우는 유머가 넘쳤다.

“유머 코드 속에도 가학적 공격적 요소가 많다. 비극과 희극은 깻잎 한 장 차이다. 바보 영구도 굉장히 슬픈 이야기다. 지적 장애인 이야기 아니냐. 개그콘서트를 좋아하는데, 개콘도 초점을 살짝 다르게 맞추면 관객을 울릴 수 있다.”

-요즘 작품을 보면 광고장이보다는 예술가 같다는 느낌도 든다.

“‘개념 예술’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해석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자유다. 나에게 광고는 문제해결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대중을 위한 작업을 하고 대중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 나의 역할모델은 ‘방망이 깎는 노인’이다. 요즘 누가 방망이 깎아 쓰나. 그러나 세상의 기준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방망이를 열심히 깎고자 한다.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도 역할모델이다.”

-재능교육센터 일에 대하여 소개해 달라.

“주말에 한번씩 모여 재능을 기부하여 사회공익광고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이 기사를 보는 독자분들도 관심 있으면 매체를 제공해주면 고맙겠다. 광고 제작하는 분들도 도와주시면 좋겠다. 우리 회사는 조그맣기 때문에 다 못 한다. 많이 참여해주시면 감사하겠다.”

-향후 비전과 계획은 무엇인가?

“소통, 특히 시각적인 소통으로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이루고 싶다. 당면한 국가적 문제에서부터 사소한 문제까지. 나라 전체가 소통이 안 되고 있다. 정부가 좋은 정책을 내놓아도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정책이 실현되지 못한다. 소통의 창구가 되고 싶다. 미디어의 도움도 필요하다. 광고를 통하여 국민들이 정신적 심리적 차원에서 치유되고, 더 건강하고 밝고 살맛나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야박하고 스트레스 받고 자살하는 그런 세상 말고. 그리고 한국을 넘어 아시아권에 집중하고 싶다. 미국은 블루오션이 아니다. 미래는 아시아에 있다. 집은 한국이었고, 학교는 미국이었고, 직장은 아시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리 권오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