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옥인동 이완용 가옥/유영호의 서울 골목길 탐방

나나수키 2016. 8. 30. 15:56

이완용 가옥을 ‘친일박물관’으로 / 유영호

등록 :2016-08-29 18:30수정 :2016-08-29 21:30


서울 골목길 탐방가

단재 신채호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을 때는 ‘부정의 역사’를 잊지 말라는 의미가 강하다.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히로시마 원폭 돔을 남긴 것이 그런 경우다. 유네스코 역시 이것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받아들여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1996년 김영삼 정부가 폭파시킨 조선총독부 건물은 경복궁 복원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으나 또 다른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런 네거티브 문화유산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현재로서는 병자호란 때 조선의 굴욕을 상징하는 ‘삼전도비’가 전부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조차 2번이나 매장해 버렸지만, 1963년 대홍수로 다시 그 모습이 드러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네거티브 문화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바로 5천년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러웠던 일제강점기 매국의 역사를 상상하게 해주는 이완용 가옥(사진)이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 19번지에 그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다. 무덤조차 ‘오래 둘수록 치욕만 남는다’는 이유로 그의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폐묘되고 없는 현실에서 이완용의 매국을 되새기기에는 최고의 소재이다.

이완용은 한일병합 뒤인 1913년 완공된 이곳에서 줄곧 살다가 죽음도 1926년 여기서 맞았다. 당시 이 집은 구체적으로 옥인동 19번지(2817평), 18번지(280평), 2번지(646평) 등 3필지로 총 3700평이 넘는 규모였지만, 광복 후 필지가 분할되면서 안채 등의 여러 부속건물들은 사라졌고, 19번지 일부의 땅에 이완용 가옥의 중심인 바깥채 2층 석조건물만 남아 있다. 참고로 현재의 옥인교회, 아름다운재단, 길담서원 등이 모두 이완용 가옥의 대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집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남로당 간첩으로 처형된 김수임이 당시 미군정 헌병대 사령관 존 E. 베어드 대령과 함께 살던 곳이기도 하다. 이완용 가옥 바로 옆에 최근 재건축 문제로 이곳 주민들과 마찰을 빚고 있는 ‘옥인동 대공분실’이 위치해 있다. 이렇듯 이 집은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이 그대로 담긴 곳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로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최근 종로구 가회동 일대의 북촌이 도시관광지로 인기를 끌면서 이곳 옥인동 일대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종로구에서는 이 일대를 관광지로 키우기 위해 수많은 안내서와 지도 등을 배포하고 있지만, 유독 이곳만 빠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서촌’(세종마을)으로 불리는 이곳에 관한 서적도 상당수 출판되고 있지만, 이완용 가옥에 대한 서술은 없다. 설사 있더라도 이곳에 ‘이완용 가옥이 있었다’는 과거형일 뿐이다.

이렇게 온전히 남아 있는 그의 집은 근대 건축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참혹했던 한말, 일제강점기를 상상하게 해주는 좋은 역사자료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곳 이완용 가옥이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매국의 역사를 낱낱이 밝혀내고, 그것이 영원히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곳 이완용 가옥이 일명 ‘친일파박물관’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