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서 미안하다 등록 : 2014.09.04 18:46 수정 : 2014.09.04 21:57
뒤늦게나마 팽목항에 가려고 한다. 유족들에게 엎드려 빌려고 한다.
나를 비롯해 일흔 넘은 늙은이들이 저지른 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먼저 내 잘못으로, 어른들 잘못으로 속절없이 죽어 간 어린 넋들에게라도 용서를 빌어야 하겠다. 이제 더는 속이지 않아야겠다.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원인에 대한 세 가지 자료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민을 속이기 위한 자료. 둘째, 유가족을 속이기 위한 자료. 셋째, 자신을 속이기 위한 자료. 이 자료들은 오로지 통치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그 어느 것에도 진실은 담겨 있지 않다. 거짓 자료에 둘러싸인 최고 통치자는 날이 갈수록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다. 이 세 자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 둘, 인 것을 아니라고 하고, 아닌 것을 이라고 한다. 국민도, 유가족도, 자신도 바보로 만드는 이 멍청이 짓을 정부 여당이 거들고, 경찰, 검찰, 국정원이 부추기고, 야당이 들러리 선다.
꿈에 어느 죽은 시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가위눌린 꿈이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게 일인데/ 곡식 심어 가꾸고 실 자아 베 짜고/ 땅 다져 집 짓는 게 일인데/ 저 높은 곳에서 떵떵거리는 것들은/ 머리 굴려 사람 굶기고 벌거벗기고/ 안 재우는 게 일이 되어 버렸다.// 한두 놈 잘살자고/ 스물, 서른 떼거지 만드는 게/ 일이 되어 버렸다./ 가두고, 무릎 꺾고 목 조르는 게/ 일이 되어 버렸다.// 서비스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힘센 나라에서 온 돈밖에 모르는 것들/ 궁둥이 닦아 주고 가랭이 벌려 줄 아이들/ 무더기로 키워 내서/ 연지 찍고 분 바르고 굽신대게 하는 게/ ‘국가 정책’, ‘경제 살리기’의/ 깃발이 되어 버렸다. // 국가 폭력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온 나라 구석구석/ 경찰, 검찰, 군대, 국정원 개들 풀어/ 엠한 사람 가두고 쫓고 죽이고/ 시체까지 바꿔치는 게 일이 되어 버렸다.// 통치자의 직무 태만과 근무지 이탈이/ ‘사생활’로 둔갑하고/ ‘국가 안전’은 /허수아비 총리 몫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선실 안에서/ 떼로 엉켜 죽어 가는데/ ‘전원 구출’이 국영방송을 타고/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속이고 속이고 또 속이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잔꾀만/ 머리에 가득한 이 밥버러지들/ 온 국민을 수장시키고도/ ‘교통사고’라고 주둥이 놀릴 것들// 우리가 남이가./ 그래, 너와 나는 남이다./ 우리는 남이다./ 갈라서자, 갈라서자./ 깨끗이 갈라서자.// 낫 들고 일어서자. 삽 들고 일어서자./ 호미와 괭이 들고 일어서자./ 망치 들고, 시멘트 포대 들고 일어서자./ 바늘 들고 가위 들고 일어서자.//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 뒷전이고/ 주리고 헐벗고 잘 곳 없어/ 헤매는 이들 아랑곳없이/ 돈만 되면 최루탄도 유해 식품도 대량살상 무기도/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어 내도/ 좋고, 좋고, 다 좋다는 이것들// 몰아내자, 쓸어 내자, 잘라내자./ 돈독 올라/ 눈에 뵈는 게 없는 것들/ 권력 맛에 혓바닥 갈라져/ 똥, 된장 가리지 못하는 것들/ 이것들과 등 돌리지 않으면/ 손발 놀리고 몸 놀려 일하는/ 우리 모두 살길이 없다./ 오갈 데가 없다./ 일어서자, 일어서자, 일어서자.
죽은 시인이 꿈에 나타나 피 토하며 울부짖는데도 나는 일어서지 못했다. 갈라서지도, 등 돌리지도 못했다. 가위가 눌려 식은땀만 흘렸다.
남영동에서 김근태가 겪었던 ‘짐승의 시간’이 떠올랐다. 유신과 독재의 악몽이 기억 속에 되살아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날 밝기만 기다렸다. 대문 박차고 계단으로 떼지어 올라오는 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근안이 오기도 전에 내 온몸의 관절은 이미 뽑혀 있었다. 옴쭉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날은 아직 밝지 않았다. 팽목항에서 건너 보이는 맹골수도의 뻘물처럼 짙고, 세월호 선실에 갇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곡기를 끊고 있는 아비 어미의 메아리 없는 외침처럼 깜깜한 절망의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왜 이 나라 꼴이 이 꼴이 되었는가. 요즈음 나와 ‘불한당’(불경을 한글로 푸는 모임)에 몸담고 있는 도법스님이 까칠하게 말마디를 잘랐다.
“당신 탓이지. 일흔 넘은 늙은이들이 저지른 업보를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 받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나는 절에 들어가 천일 동안 엎드려 절해서 살풀이할 테니까 당신은 죄 없이 총 맞고 칼 맞아 죽은 사람들 넋들이 떠돌고 있는 데 싸돌아다니면서 싹싹 빌어. 잘못했다고. 그래도 아마 용서받지 못할걸.” (속으로) ‘그 중놈 주둥이 하나 사납네.’ 내가 길 떠날 마음을 먹은 뒷배경은 이렇다. 친절도 하셔라. 도법이 구시렁구시렁 몇 마디 더 보탰다. “혼자 삼년상 치르라는 거 아녀. 한 늙은이가 하루 상 치르고 나면 또 한 늙은이가 뒤이어 하루 상 치르고. 이렇게 늙은이 천명만 뜻을 내면 삼년 동안 죗값 치를 수 있어.” “어버이 연합 늙은이들도 함께 가자고 할까?” “그것도 좋은 생각이여.” 지난주 수요일 이야기다.
뒤늦게나마 팽목항에 가려고 한다. 가서 유족들에게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려고 한다.
온 나라 아이들에게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친 죄. 그것이 바른 답이 아니라 정해진 답이라고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죄. 교과서를 성경이나 불경이나 코란보다 더 권위 있다고 떠받들게 한 죄. 그 교과서를 털끝만큼도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한 죄. 창조적인 재해석을 불가능하게 한 죄. 교과서에서 나오는 시험의 정답은 교육부가, 교사가, 어른들이 정하는 것이므로 그 정답을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을러댄 죄. 그 정답을 고스란히 맞히지 못하면 좋은 대학에 못 가고, 좋은 대학을 못 나오면 좋은 직장 못 얻고, 좋은 직장 못 얻으면 좋은 신랑 좋은 신부 맞아서 알콩달콩 살 수 없다고 속인 죄. 그런 교육을 받은 단원고 학생들이 배가 기울어 물속에 잠겨 가는데도 ‘선실 안에서 기다리세요’라는 말을 정답으로 믿고 얌전하게 자리를 지키다가 죽음에 이르게 한 죄. 내가 저지른 죄가 어디 그뿐이랴. 지난 50년 동안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깨끗한 땅, 맑은 물, 맑은 공기를 깡그리 더럽혀 놓고, 근대화의 이름으로, 성장의 이름으로, 새마을운동의 이름으로, 바르게 살기 운동으로, 정의 사회 이름으로, 경제 살리기 이름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강이란 강은 죄다 썩어 가게 방치한 죄. 한술 더 떠서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온 국민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발맞추는 데 한몫 거든 죄. 국민소득 지수가 곧 행복 지수라고 떠드는 년놈들 입에 자물쇠를 채우지 못한 죄.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려고 부지런히 몸 놀리고 손발 놀려도 살길이 없어서 곡식과 남새가 자라는 땅을 갈아엎고, 타워크레인과 공장 굴뚝에 올라가 목 놓아 외치는 사람들 곁을 지켜 주지 못한 죄….
나를 비롯해 일흔 넘은 늙은이들이 저지른 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 죄는 하루이틀에 갚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먼저 내 잘못으로, 어른들 잘못으로 속절없이 죽어 간 어린 넋들에게라도 용서를 빌어야 하겠다. 이제 더는 속이지 않아야겠다. 속죄의 삼년상을 치르고도 갚지 못한 죄는 몸을 불살라서라도 갚아야겠다. 이 글이 신문에 나는 날, 나는 삭발하고 팽목항에 가 있을 것이다. (늦어서 미안하다.)
윤구병 농부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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