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6 19:21 수정 : 2014.07.0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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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장 모네는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사업가이자 외교관이다. 그는 1888년 코냐크 지방에서 포도주 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 가는 대신 16살부터 가업을 위해 해외를 여행하며 현실세계에 대해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여행을 떠나는 아들에게 책을 가져가지 말라고 가르쳤다. 누구도 너를 대신하여 생각해 줄 수 없으니 창밖을 바라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직접 배우라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장 모네는 프랑스 총리를 만나 건의하고 영국 관계자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연합군의 효율적인 군수물자 조달을 위해 일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31살에 국제연맹의 사무차장이 되었고 장제스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철도건설 사업을 자문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영-불 조정위원회 의장으로서 다시 한번 연합군을 위해 전시 물자를 조달하는 일을 책임 맡았고 미국의 전쟁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의 활동을 두고 케인스는 장 모네 덕분에 2차 세계대전이 1년은 더 일찍 끝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장 모네는 이미 서로 다른 나라 사이의 이해를 조정하여 가장 효율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두 차례의 전쟁 경험을 통해 유럽의 평화를 위해 강력한 연방정부를 중심으로 한 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독일 루르 지역의 석탄·철강 공동관리를 핵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유럽통합 방안을 기획하였다. 그의 제안은 조르주 비도 총리에게 먼저 제시되었지만 총리가 이 기획의 중요성을 놓치는 사이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에 의해 받아들여져 결국 1950년 쉬망선언으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유럽연합의 모체가 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그는 초대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장 모네는 그의 인생 대부분에서 공적 직함이 없는 개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럽통합에 헌신한 공로로 1976년 유럽정상회의에 의해 최초의 유럽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고 1979년 사망한 뒤 현대 프랑스인으로는 드물게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그는 어떤 일도 사람이 없으면 시작될 수 없고 제도가 없으면 지속될 수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각국의 이해로부터 벗어나 유럽통합의 비전을 공유한 유럽의 엘리트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를 통해 유럽통합을 제도화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대통령도 아니었고 총리도 아니었지만 20세기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큰 실험 가운데 하나인 유럽통합의 기초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만약 그가 총리였다면 오히려 그의 제안은 주변국의 의심과 견제 속에 실현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 모네 자신은 이에 대해 세상에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과 누군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은 누군가가 되기보다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기를 원했고 그 일이 곧 유럽통합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일까? 무슨 일을 하는 삶과 누군가가 되는 삶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까? 무슨 일을 하는 삶도 좋고, 무슨 일을 하기 위해 누군가가 되는 삶을 선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누군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인도 불행해지고 자신이 책임 맡은 공동체도 힘들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더구나 자신이 오랜 기간 헌신하여 그 일에 전문가가 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공동체의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 누군가가 되겠다고 나서는 일은 삼가야 한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