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친 교황, 중립한 대통령 등록 : 2014.08.19 18:45
8.15 경축사에서 ‘세월호’라는 말 쓰지 않은 박 대통령
“유족들의 고통 앞에서 중립 지킬 수 없었다”던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 영접 나온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세월호’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 거론했을 뿐이다. “올해 들어 잇따라 발생한 사건 사고들은 오랫동안 쌓여온 비정상적 관행과 적폐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는 문장 속에 세월호는 엄정한 가치중립으로 녹아 있다. 대통령에게 세월호는 그저 숱한 사건 사고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세월호를 중립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정부의 책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했던 새누리당 의원의 인식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귀국 비행기 안에서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비행기에서도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 ‘중립’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처신함’이라고 나온다. 세월호 앞에서 공정할 수 없었고 치우칠 수밖에 없었노라는 교황의 고백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추기경 시절 겪은 참사를 소개하며 “당시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떠올렸다. 2004년 12월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이트클럽 ‘레푸블리카 크로마뇬’에서 불이 났다. 업주는 연말 대목을 놓치기 싫었다. 정원을 초과해 1500명이나 되는 손님을 받았다. 술값을 안 내고 나가는 사람이 있을까 봐 출구는 잠가놓았다. 탐욕은 피해를 키웠다. 195명이 죽고 700여명이 다쳤다. 대부분 젊은이였다. 클럽은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의 집에서 가까웠다. 추기경은 누구보다 빨리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추기경은 크로마뇬 참사 1주년 미사에서 이렇게 외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통곡해야 합니다. 이 도시는 당신들이 흘리는 눈물로 정화돼야 합니다. 이 산만하고 피상적인 도시는 스스로 깊은 비탄에 빠져야만 정화될 것입니다.” 4년이 흘렀지만 수십명의 관련자 가운데 14명만 유죄판결을 받고 사건은 흐지부지된다. 분노한 추기경은 참사 5주년 미사에서도 잊지 말자고 호소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직 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일하고 아첨하고 돈 버는 데 골몰하고 주말을 어떻게 즐길까 신경 쓰느라 더는 여기에 없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충분히 울지 않았어요.”
교황이 세월호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건 아니다. 다만, 잊지 않고 가슴에 간직하고 기억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노란 리본 달고 유족 얘기 들어주고 유족의 눈물이 어린 ‘순례 십자가’를 바티칸행 비행기에 실었다. 교황이 던진 무언의 메시지는 어떤 말보다 강력했다. 잊혀가던 세월호는 교황의 ‘말 없는 말’의 힘으로 강렬하게 되살아났다. 교황은 타인의 울음에 무디고 우는 법을 잃어버린 도시를 ‘피상적 도시’라고 질타한다. ‘무엇이 옳은지 분별하기보다 최신 유행이나 기기, 오락에 빠지는 경향’이라고 교황은 피상성을 설명한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는 사회, 더 통곡해야 할 때 울음을 그친 사회는 피상성에 빠진 사회다. 우리는 지금 ‘피상적 도시인’ 아닌가. 교황은 아프게 묻고 있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과거 잘못을 묻어두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간 곳은 없다”며 “그것은 깨진 항아리를 손으로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세월호 중립’은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유족의 애끊는 고통 앞에 엄정한 중립은 위로의 손길조차 내밀지 않으려는 매몰찬 냉혹이다. 대통령은 지금 깨진 항아리에 한 손을 얹고 있는 거 아닌가.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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