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인터뷰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닌 필요성

나나수키 2014. 6. 28. 13:55

 

등록 : 2014.06.03 09:36 수정 : 2014.06.09 17:17

3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가 끝나고 안영춘 편집장이 내게 물었다. “이계삼 선생을 만나고 나니 어때요?”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한 사람 같다고 말했다. 시끄러운 술집인지라 자세히 소감을 이야기하기엔 어차피 들리지 않을 것 같아 느낌을 짧게 줄이느라 다급히 찾아낸 표현이었다. 말하고 나니 만나기 전엔 불순하게 추측했다는 의미 같아서 부연 설명을 덧붙이려 했지만 언어유희를 즐기는 편집장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럼 한 선생은 자신을 순수하지 않다고 느껴요?”라며 습격해오는 통에 방어하느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글의 이런 화두를 잡고 시작해보려 한다. 왜 나는 얼결에 ‘순수’라는 단어를 택했을까라는 의문.

글이 아니라 삶으로 쓰이는 사람

평소 이계삼에 대한 인상은 참으로 옳고 좋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하긴 선하게 생긴 사람이 선하게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의 사진이라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결코, 순하게 생기진 않았어도 확실히, 선한 얼굴이다.) 관상뿐만 아니라 그에겐 뭐든 자연스럽다. 국어를 전공했으니 글을 잘 쓰는 것도 자연스럽고, 교사로서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도 자연스럽고, 밀양에 살고 있으니 송전탑 반대 투쟁에 나서는 것마저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그가 약간 이상주의자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석유 자원이 50년 내로 바닥난다고 해도 요즘 같은 시대에 ‘농업이 답이다’라고 주장하거나, 농사와 교육을 하루라도 빨리 엮어내고 싶은 마음에 한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직장인 학교를 때려치운단 말인가. 더군다나 40대 초반의 대한민국 남성이 말이다!

나는 약간 공격적인 질문들을 준비해갔다. 마지막 보루인 양 그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고향에 뿌리를 내리자’거나 ‘농사를 짓고 살자’는 식의 말은 너무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고향을 떠올릴 때 논밭이 펼쳐진 시골이 그려지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고 있는데, 대도시 아파트촌이 고향인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뿌리를 내리자는 말은 설득력이 없지 않느냐고도 물었다. 이계삼은 약간은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처음엔 정말 문자 그대로 자신도 그리 믿었단다. 인간은 식물 같은 존재라 뿌리를 내릴 곳이 필요하고, 너무 거대하지 않은 적정 규모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사는 것이 인생의 진짜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하지만 이런 말이 마치 ‘교회에 안 나오면 천국 못 간다’는 구호처럼 해석되는 것 같아 지금은 좀더 유연하게 바뀌었다고 했다. 고향이란 결국 가족·친구·이웃이 있는 곳이고 내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니까, 물리적으로 꼭 시골이 아니어도 도시에서 살아도 고향에 뿌리를 내린 삶이 가능하다며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사실 마지막에 도시에서 뿌리내리기에 관한 그의 설명은 좀 어색했다. 논리정연한 글솜씨만큼이나 술술 흘러나오는 말솜씨도 뛰어난데, 다른 질문들의 답에 비해 대충 눙치고 넘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그의 설명이 오히려 내겐 충분했다. 분명 그는 여전히 인간은 농사를 지으며 땅의 정직함을 배우고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이런 충돌이 일어날 때 이른바 지식인들, 특히 자신을 좀 그럴싸한 인물로 꾸미고 싶어 하는 이들일수록 자신이 처음 믿는 것을 버리고 좀더 대중의 구미에 맞게 절충안을 찾거나 포장하기 시작한다. 아님 아무도 못 알아듣게 잔뜩 개념어만을 넣어 설명하거나. 이렇게 ‘절대적으로 올바른 것’은 이미 있다는 전제하에 합리적인 양 설명하려니 결론으로 갈수록 사람들을 꾸짖거나 부추기는 화법을 구사하게 된다. 하지만 이계삼은 그러지 않는다. 충돌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그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믿음대로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고향에 뿌리내리자’라든지 ‘농업만이 살길’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건 스스로 하는 다짐과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실제로 자신이 느끼고 깨닫고 감동받고 성찰하며 아는 대로 이미 살아오고 있지 않은가. 10대 후반에 핍박받는 선생님들을 보며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도, 20대 후반에 정말 교사가 되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그리 열심히 했을 때도, 마흔에 더 이상 사기치기 싫다고 교직을 그만둘 때도 그렇지 않았는가. 그런 그에게 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될 만한 좀더 보편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느냐고 물은 것이다.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그의 몫이 아니다. 그는 글로 쓰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삶으로 써나가고 있는 사람이므로.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되자

그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날을 회상하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투사가 될 자신은 없었지만 저 선생님들처럼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교사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전교조 선생님들이 교문 밖으로 쫓겨나는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왜 고통받는 자가 되는 것이 투사가 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 인터뷰 때 차라리 이것을 질문할걸 그랬다. 이렇게까지 멋들어진 표현을 어떻게 떠올리게 되었느냐고 물어봤어야 했다.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것으로 하자면 나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동성애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아직 저런 표현을 머리에 떠올려보지 못했다. 사랑 덕분에 행복하고, 사랑이 있어 살맛이 나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인권활동가란 타이틀을 짊어지고 살고 있지만 스스로 ‘투사’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왜냐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세상을 위해, 대의를 지키기 위해,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 편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진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크고 위대한 일 대신 좀더 작고 내가 즐겁게 할 만한 일거리는 챙겨볼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느새 18년이나 흘렀는데 그의 마음도 혹시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 차이가 있다. 나는 동성애자로서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성애자로 살 수는 없으니!) 그는 반드시 교사가 되어야 했던 건 아니다.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보다 깨달았다. 사랑 때문에 고통받는 이가 되겠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고통 때문에 사랑하길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구나. 그런 마음으로 학생들을 대했겠구나. 이런!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보다 훨씬 더 절절하고 훨씬 더 영원할 것 같은 다짐이지 않은가.

아, 그렇지. 문득 정현종 시인의 ‘고통의 축제-편지’란 시가 떠오른다. 여전히 내게는 심오한 시이지만 왠지 그와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시의 전체를 봐야겠지만 부득이 일부만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생의 기미(機微)를 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이 기미지, 그게 얼마나 큰 것입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중략)

나는 감금(監禁)된 말로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금된 말은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감금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나는 감금될 수 없는 말로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영원히 나는 축제주의자(祝祭主義者)입니다. 그중에 고통의 축제가 가장 찬란합니다. 합창 소리 들립니다. <우리는 행복하다>(까뮈)고 생(生)의 기미를 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안녕.

고통에 관해서라면 2013년 그가 <한겨레>에 쓴 칼럼이 한 편 있다. 취업에 불이익을 혹여 받게 될까봐 밀양 송전탑 반대를 도와달라는 할머니들의 요청을 외면한 어느 제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고통의 해석학’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극심한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의미 없는 고통은 참을 수 없다. 취업하지 못한 고통은 취업으로 피해갈 수 있다. 그러나 관문 앞을 기다리는 궁전의 집사처럼 취업 이후에도 또 그 뒤에도 오늘날 체제가 부과하는 고통은 순서대로 찾아온다.”

고통은 대체로 참아야 하는 것이라 하지만, 참는 것 자체가 다시 더 큰 고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고통은 그 순간에 참지 않아야 한다. 피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럴 때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식의 대응법마저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교묘한 유혹일 뿐이다. 즐기고 못 즐기고를 개인의 역량이나 취향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이런 고통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막는다. 그래서 고통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는 고향의 할머니들이 올라와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외면했을 때 받은 고통과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될 고통의 차이를 헤아려볼 줄 알아야 한다고 제자에게 권한다.

이계삼에게 ‘고통’이란 단어는 이리도 특별하다. 이렇게 보니 그에게는 보통 투쟁 현장에서 뛰고 있는 활동가들에게 붙이는 ‘치열하게 산다’는 유의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냉철이든 열정이든 온도와 관련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뿜는 것보다 품는 것이 많아서일까. 글의 앞부분에 말한 것처럼 뭘 해도 자연스러운 그의 품성 탓일까?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 서지 않아도 영락없이 그는 ‘교사’ 같다. 수도 없이 다양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씨줄과 날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그저 고민도 많고 생각도 많고 연민도 많은, 무릎 굽혀 다가앉은 ‘교사’ 같다. 아마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을 피하지 않는 한 그는 누군가를 애써 가르치지 않는다 해도 ‘교사’일 것이다. 처음 가졌던 꿈 그대로.

이제 슬슬 이 글의 처음 화두로 돌아가볼 때다. 나는 왜 순수하다고 느꼈을까. 응당 눈빛이 맑고 몸에 스며든 권위가 없는 남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년 같은 이미지를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까닭으로 순수하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던 건 아니다. 이계삼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와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아, 이 사람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핵심 기제는 가능성이 아니라 필요성이구나. 그런데 이토록 순수하게 필요성에만 천착할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라 필요성이다

필요성이라고? 이계삼이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도구화되고 수단화되는 필요성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삶은 가능하다’라든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와 같은 문장은 어떤가. 지금과 다른 삶도 충분히 가능하니 당장 새로운 계획을 세우라고, 현실에 갇혀 있지 말라고 독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는가? 없다. 가능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무엇을 약속하거나 보장해주는가? 없다. 마치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해결을 위해선 가능성에 기대어 로또를 사듯이. 그렇게 매주 필요는 채워지지 않고 버려지는데 가능성은 희한하게도 그대로 남아 더 커지지 않는가. 비정상적으로.

설사 물리적으로 패배한 싸움이 되더라도 밀양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송전탑으로 제기된 국가 에너지 수급 체계의 문제점이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한겨레 김명진
이런 면에서 그는 매우 단순하다. 한때는 가능성을 믿으며 교사가 되었더랬다. 전교조라는 너무나도 빛나는 가능성을 만났고 기대했고 헌신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전교조는 스스로 가진 그 무한한 가능성으로 오히려 빠르게 낡아버렸다. 가능성에 기대는 일에도 지쳐서 사퇴서를 던지고 학교를 나왔다. 그는 가능성만을 믿으며 현실에 적응하는 대신 분명한 필요성에 기대어 무모한 실천을 하기로 했다. 다른 삶이 가능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제 다른 삶이 너무 필요하기에 움직인다. 그뿐이다.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니 한번 해보자가 아니라 지금 다른 세상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뭐든지 해보려고 한다.

2011년 <지역과 학교>라는 격월간지(3~4월호)에 실린 글에 그의 이런 생각이 잘 정리돼 있다.

그러므로 나의 희망은, ‘풀무학교 전공부’ 같은 학교를 내가 사는 곳에서 소박하게나마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작은 학교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뿌리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최소한의 물질적 삶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신용론에 바탕을 둔 공공통화를 발행할 수 있도록 농업 부흥의 의제를 제기하고 실천하는 것이 또한 나의 꿈이다. 둘 다 그럴듯하게 들릴지언정, 꿈같은 소리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진보 진영에서 한창 이야기되는 ‘핀란드 교육 모델’이라든지 ‘복지국가’보다는 이것이 훨씬 실질적이며 근본적이며 또한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까운 벗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한 갸웃거린다. 그러나 나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듯, ‘기대’(expect)가 아니라 ‘희망’(hope)을 갖고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직접 해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말고는 달리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그랬지만 글에서도 좀처럼 선동하는 어투를 쓰지 않는다. 일어나자! 헤쳐나가라! 이런 유의 표현이 거의 없다. 그는 모든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이 읽은 책에서 눈여겨본 부분을 인용하고 풍부하게 살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며,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이 무엇이 더 있는지를 자신에게도 던지는 듯한 질문으로 마무리한다. <한겨레>에 실리는 원고지 10장도 되지 않는 짧은 칼럼 하나를 쓰는 데 15시간 정도 끙끙대며 쓴다는 말이 놀라웠다. 워낙 글을 잘 쓰는 분이니 그 정도의 원고는 두어 시간 만에 뚝딱 써낼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를 물으니 더 잘 쓰고 싶기 때문이란다. 잘 써서 필력을 드높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밀양의 이야기를 전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고, 더 관심을 가지게 될지 이 귀한 기회를, 한정된 지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란다.

순수하다는 것은 순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상보다 순수하다’고 말이 툭 나간 건 그가 자신의 꿈이나 목표, 삶의 계획을 세우는 방식이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였다. 물론 학교를 왜 그만뒀을까, 왜 밀양에 내려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꿈꾸던 농사와 학문이 만나는 학교를 만들기는커녕 3년째 송전탑과 싸우고 있는 걸까 하는 후회도 곧잘 한다고 그는 고백했다. 하지만 그가 엎치락뒤치락 마음의 씨름을 벌인다 해도 결국 그 끝자락에 남는 건 그때 다른 것을 선택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는 미련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꿈에 가장 가깝게 지금, 당장, 꼭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가 나의 해석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장면들이 상상됐다. 정직한 갈등과 소박하고 단순한 원칙 안에서의 결론내기. 술집에서 편집장이 툭 질문을 던졌을 때, 그걸 반복하며 매번 앞으로 걸어나갔을 그가 떠올라 얼결에 답이 그리 나갔다. 순수하다고. 수없이 그를 기소하고 검거하던 대한민국 경찰이나 검찰이 들으면 웃을 일일까.

현재 이계삼을 설명하는 타이틀은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이다. 평생 선거 때마다 1번만 찍었다는 말로 표현되는, 그동안 국가가 하는 일에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았던 분들과, 이 어르신들보다는 짧은 생이지만 그래도 평생 세상의 질서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며 기득권이 하는 일에 매번 토를 달던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서로 다르게 살았어도 같은 질문을 가지게 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된다. “국가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가”라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질문은 “과연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진 이계삼과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지우지 말자, 잊지 말자 그리고 외롭게 하지 말자

문제는 이런 절박한 질문에 국가는 답을 할 의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끝도 없지만 가장 가까이의 몇 가지 사건만 나열해보아도 알 수 있다. 서울의 용산부터 경기도 평택, 경남 밀양, 그리고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까지 우리는 탐욕에 번들거리는 민낯을 한, 자본과 다른 이름일 수 없는 국가를 보았다. 고통이나 절망, 죽음과 슬픔에 반응하는 수용체마저 잃어버린 국가. 이런 상대와 싸움을 벌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이 현실에 그대로 몸을 내던지고 있는 분들. 꼬부라진 허리를 지팡이로 지탱하며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않는 국가 대신에 밀양의 그분들은 답을 찾아놓으신 듯하다. <밀양을 살다-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이라는 책의 표지에 바로 그 깨달음이 새겨져 있다.

“포기할 수 없지예. 우리가 끝은 아닐 테니까.”

송전탑을 따라가다보니 그 끝에 원전이 있더라는 사실을 누군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싸움을 하면서 깨달으신 것처럼, 이 싸움의 끝에는 다음 사람이, 다른 삶이 있음을 이제 우리에게 다시 일러주신다. 그것은 늙고 힘없고 가난하다고 하여 포기할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의무라고 증언하신다.

송전탑을 세우는 건 반대하지만 아무리 반대해도 송전탑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송전탑은 정말 완공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송전탑을 따라 고압전기가 흐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오더라도 그날이 결국 지나간 과거가 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삶을 지속할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지속할 수밖에 없기에, 바로 자신의 오랜 고향에서 삶을 지속하고 싶기에 싸워왔으니 절망해도 바로 그 자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항하며 지속되는 삶은 저항을 멈춘 삶과 결코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송전탑이 지나가는 곳에 한 평의 땅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기꺼이 함께 싸운다.

9년 동안 밀양 송전탑을 둘러싸고 쌓인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은 지금 세월호 참사 이후 쏟아지는 온갖 분석과 비판과 반성으로 언급되는 부분과 놀랍도록 같은 꼴로 겹친다. 그래서 무섭다.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대체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었단 말인가. 이토록 이상한 나라에서 어떻게. 설사 물리적으로 패배한 싸움이 되더라도 밀양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송전탑으로 제기된 국가 에너지 수급 체계의 문제점이 흩어지진 않아야 한다. 비극 앞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속상해서 문드러지는 마음 한 조각까지 끌어안는 싸움으로 모여야 한다.

잊지 말자, 기억하자는 말이 자주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외롭게 하지 말자’는 말이 요즘은 가장 가슴에 꽂힌다. 우리 서로를 외롭게 하지 말자.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밀양 송전탑 문제를 글로 써온 것도 다 외롭게 하지 않으려, 외로워지지 않으려 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면 새롭게 다가온다. 만약 기록을 읽는 것도 외롭게 하지 않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가장 최근에 나온 책 <밀양을 살다>부터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겠다.

이 글의 마지막엔 그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 밀양을 외롭지 않게 애써줘서… 감사합니다. 이계삼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