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박준영 변호사를 움직이는 힘,측은지심 /우리들의 변호사

나나수키 2017. 1. 1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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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변호사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다”

『우리들의 변호사』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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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하게 상대방에게 공감을 해야 선의가 나오거든요. 공익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불쌍해야 다가서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측은지심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삼례 사건도 진범의 측은지심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삼례 친구들을 보고 진범이 너무 불쌍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선 거예요. 그게 측은지심 아닙니까? 저는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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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omotives Round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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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포털사이트 다음의 ‘스토리펀딩’을 통해 파산 위기에 놓인 한 변호사의 사연이 공개됐다. 기사의 제목은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주인공은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이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무기수 김신혜의 재심을 이끌어낸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기사가 공개된 지 사흘 만에 1억 원 이상의 후원금이 모였고 최종 모금액은 목표의 5배를 넘어섰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며 박준영 변호사는 ‘측은지심’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 경이로운 기록에 담긴 것은 애처로운 마음만은 아니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일-누군가는 해야 할 그 일을 짊어져 준 데에 대한 고마움이었고, 그만큼 무거운 부채감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질문이기도 했다. 변호사 박준영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볼 때, 우리는 그에게 묻고 싶다. 신념대로 산다는 것,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 『우리들의 변호사』는 그에 대한 응답이라 할 만하다.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나 장례식에 쓰이는 종이꽃을 접으면서 자라난 그가, 문제적 청소년기를 보내고 ‘내세울 만한 학벌도 배경도 없는 변호사’가 된 그가, 어떻게 우리 사회의 희망의 증거가 되었는지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억울한 이들을 찾아가 먼저 손을 내밀고 그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는 일, 그 고단한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도록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것들에 대해 덤덤하고도 뜨겁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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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제가 필요한가요?


『우리들의 변호사』라는 제목이 뭉클합니다. 책에 담긴 모습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변호사의 그것인데, 현실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잖아요.

 

제목은 출판사 측에서 지어주셨는데, 솔직히 저에게는 조금 부담이 가는 제목이기는 했어요. 지금까지 10년 이상 변호사로 살았는데, 정의만 생각하고 살았겠습니까. 분쟁 속으로 들어가서 한쪽을 대변하다 보면 못된 짓도 했죠. 문제가 있어 보여도 애써 외면했던 경우도 있고, 형사 사건 변론하면서 문제가 있음에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부분도 있죠. 그런 과거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정의의 상인 것처럼 나온다는 건 부담스럽기는 해요. 하지만 냉정하게 제 상황을 고백할 때는 고백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변호사가 나아갈 발전적인 방향을 이야기하고 제가 어떻게 살 것인지 다짐을 담는 제목이라면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도 있잖아요. 수임료만 받으면, 의뢰인이 정의로운 사람이건 그렇지 않건, 변호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변호사의 윤리라는 것도 있거든요. 우리가 이 윤리를 재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 때는 의뢰인의 관점에서 의뢰인의 주장을 대변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었어요. 때로는 양심에 걸리는 행동이나 문제 있는 행동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변호사는 어쩔 수 없어, 그럴 수밖에 없는 직업 아니야?’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변호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해야 되고 나의 주관이나 선입견, 편견을 가지고 의뢰인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깎아 내리는 시도를 하면 안 되죠. 그렇지만 적어도 진지한 고민 하에 얻어지는 진실이 있다면, 일단 진실의 바탕 하에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의 윤리’가 잘 지켜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까지 고민한 단계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느냐는 거죠. 일례로, 누가 봐도 대통령의 탄핵 심판 답변서는 말도 안 되는 답변서예요.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답변서를 변호사가 자기 이름으로 쓰고 기자 회견장에 나와서 얼굴을 비춘다는 자체가 아주 이상한 사회거든요. 변호사라는 사람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고민하고, 그 중요한 가치 하에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요.

 

오원춘의 국선 변호를 맡으신 적도 있으시더라고요. 그런 순간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딜레마를 느끼실 것도 같아요. 어떠셨어요?


흉악범이나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한 변호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대부분 추상적인 논리를 이야기하잖아요. 헌법에 모두가 재판 받을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고, 그 모두에는 흉악범이든 선한 사람이든 다 포함된다는 건데요. 그 추상적인 논리로는 대중들을 설득할 수 없어요. 조금 더 현실적인 논리가 필요하거든요. 제가 경험한 현실적인 논리는 뭐냐 하면, 일단 재판 제도가 가지고 있는 본질에 접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절차를 거쳐서 실체를 확정하는 것은 오판을 방지하기 위한 거거든요. 그런데 어느 하나를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조금씩 잠식이 돼서, 정말 절차를 거쳐야 되는 사건들이 악의적인 목적이나 의도 하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절차가 중요한 거거든요. 절차에 대한 예외는 아주 신중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들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벌을 받았을 때 당사자는 절대 그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요. 그러면 한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당사자의 불만이 사회적으로, 우리가 중시하지 못했던 다른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교도관들이나 국가기관의 민원실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에게 영향이 미쳐요. 저는 한 사형수한테 재심을 청구해 달라는 편지를 계속 받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저한테만 편지를 보는 게 아니더라고요. 기자 분들, 국가인권위원회, 권익위원회, 신문고.. 이런 데에 다 편지를 보내요. 이것도 사회적 피해 아니냐는 거예요. 재판을 받을 때 그 사람의 말을 다 듣고 그에 대한 판단을 해주면 그런 불만을 갖는 데 한계가 있죠.

 

지금까지 변호해 주셨던 사법 피해자들을 보면 사회적 약자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래서 더 재심을 받게 해주시려고 노력하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요?


피해를 당하기도 어려웠겠죠. 물론 우리나라 사법 피해가 항상 약자들한테 발생한 건 아니었습니다. 약자들이 절차적인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해서, 반 인권적인 수사나 재판을 통해서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지만, 이욕적인 관점에서 서로 싸우다가 더 강한 사람한테 피해를 당한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유명했던 사람들한테 연락이 오기도 해요. 더 강한 사람과 맞붙어서 진 경우죠. 그런데 그런 사건의 경우는 결국 맡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한다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물론 돈 욕심이 있었죠.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되다 보니까 그 분의 기록을 금고에 계속 넣어놨었어요. ‘정말 어려울 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서 금고에 한참 넣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돌려줬죠. 돈을 받아버리면 그때부터 사건의 순서가 달라지거든요. 돈 받은 사건 먼저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돈 없는 사람들 사건, 억울한 사람들 사건을 빨리 해줘야 되는데 뒤처지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돈을 받고 변론하는 일은 안 했어요.

 

측은지심이 덜 발동된 걸까요(웃음).


맞는 것 같아요.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은 굳이 제가 필요합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잖아요. 솔직히 그런 사람들한테는 측은지심이 조금 덜해요. 돈 이야기하면서 선임하겠다는 분들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분들은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제가 굳이 그 사건을 맡아야 될 필요성은 없거든요. 아무래도 마음이 안 가긴 해요. 대체재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재를 찾으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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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수임료를 받는 사건은 맡지 않으세요?


지금은 안 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님을 응원하시는 분들은 걱정하실 것 같아요. 펀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큰 금액을 펀딩하기는 했지만 함께한 분들께 드려야 하는 돈도 있었고, 세금으로도 적지 않게 나갔고, 기존에 워낙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빚을 갚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솔직히 여윳돈도 계산해 보게 되더라고요. ‘이 돈으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거든요. 그러다 보면 약간 답답하기는 해요.

 

그런데도 무료 변론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일반 영리 활동을 한다는 게 자칫 잘못하면 큰 무리수를 둘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이라는 것이 수임 단계에서부터 좋은 사건인지 나쁜 사건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건을 못 맡는 거예요. 앞으로의 공익적 활동을 위해서 필요해서 영리 활동을 한다고 해도, 사건 하나 잘못 맡으면 다른 공익 활동까지도 다 문제 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삼례 사건의 진범에게 접근했을 때, 그 분이 저에 대해서 부담을 갖지 않고 사실을 다 이야기한 이유는 저의 공익적 활동 때문이에요. 저를 믿은 거예요. 이게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몰라요. 그런 이미지를 제 스스로 갉아먹을 수는 없는 거거든요. 저를 스스로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야 저도 사건을 맡아서 일하면서 힘을 얻게 되고요. 어찌됐든 누군가가 앞으로 이 일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텐데, 좋은 선례로 남아주는 게 맞잖아요.

 

변호사님을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하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모든 사건을 맡을 수 없는 게 현실인데, 때로는 원망의 말을 듣기도 하신다고요. “요새 방송 인터뷰나 토론회 같은 데 자주 나오시던데, 그러실 시간에 제 사건 못 봐 줍니까?”라고요.


그게 정말 힘들어요.

 

그런 오해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실 것 같거든요. 어떠세요?


상처까지는 아니에요. 때로는 아주 감정적인 언사를 통해서 저의 마음을 자극해버리면 그때는 힘들어요. 그렇지 않고 정말 절절한 고통을 이야기할 때는 저도 미안하죠. 다른 건 몰라도 형사 사법 피해에 있어서 억울하다는 주장은 사실상 사법 시스템이나 국가 기관의 시스템으로 인한 피해거든요. 그 분들은 사회적 불이익을 받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는 어찌 보면 사회적 혜택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분들 입장에서는 ‘나는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은 사람인데 당신은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이니까 나를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이미지로 여러 형태로 이익을 받고 있다면, 그 이미지와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도 모순이고 위선이다’라고 지적을 하는 거죠. 그 논리를 제가 마음대로 너무 지나친 피해의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어찌됐든 사회적 불이익을 입은 사람들이니까요.

 

인터뷰나 방송에 출연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세요?


어찌됐든 이런 일은 연속성으로 이어가야 하는데,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는 거거든요.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야 돼요. 저를 보고 누군가가 용기를 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의 선례를 보고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끔 해주는 게 맞거든요. 그러면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게 제 합리화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그 분들의 논리를 피해의식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법 제도로 인한 피해를 입은 분들이니까 우리 사회에서 도와줘야 되는 게 맞는데 그게 안 되다 보니까 저를 찾아오시는 거잖아요.

 

그 분들을 원망하지 않으시는 것도 측은지심 때문일까요?


내 마음이 편하니까 그런 거죠. 남을 미워하고 남의 감정을 그 사람 탓으로만 몰고 가면 제가 불편해서 힘들어요. 제가 이해를 해버리는 게 편하거든요. 저 사람에게 문제 있다고 해버리면, 그 분들을 만날 때마다 미워해야 되는데, 솔직히 저도 불편해요. 그래서 이해를 해보려고 하는 거죠. 때로는 이런 분들도 있어요. ‘변호사님은 큰 사건 하시는데, 저 같은 작은 사건을 도와주기는 힘드시겠지만, 관심을 가져 주세요’라고 해요. 도와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사건의 크고 작은 개념을 규정짓고 오시는 거죠. 사회적 관심이 이슈나 가치 위주로 모아지는 경향이 있거든요.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려다 보니까 이건 작은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책에서 말씀하시길, 측은지심이 세상을 구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세요?


절실하게 상대방에게 공감을 해야 선의가 나오거든요. 공익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불쌍해야 다가서는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측은지심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봐요. 삼례 사건도 진범의 측은지심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삼례 친구들을 보고 진범이 너무 불쌍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선 거예요. 그게 측은지심 아닙니까? 저는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봐요. 제 이야기가 스토리펀딩에 소개됐을 때도 수많은 분들이 후원금과 함께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셨는데, 그것도 본질적으로 따지면 측은지심이 상당히 많이 있겠죠. 그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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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기록보다 강렬할 때가 있어요


재심 사건을 변론하시다 보면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으시죠? 사법부는 자신들의 판결을 번복하지 않으려고 하고, 증거와 기록은 잘 보존되어 있지 않고, 그러면 재심 신청 자체가 어려워지잖아요.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인가요?


증거 수집이나 밤샘 작업을 할 때의 어려움은 지나가고 나면 힘들었다는 생각이 덜 나요. 당연히 각오해야 될 일이기도 하고요. 가장 힘든 건 시간이 오래 걸리면 당사자의 고통의 시간도 길어진다는 거예요. 제가 그 부분까지 감싸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안 돼서 힘들죠. 저는 법을 공부한 법률 전문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사람의 마음을 달래가면서 할 수 있는 심리전문가는 아니거든요. 그 점에서 한계가 있어요. 재심에 수년씩 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동안에 당사자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어요. 복역 중인 무기수의 경우에는 재심 신청은 받아들여졌는데 형집행정지가 안 된 상황에서 절망하기도 하죠. 그래서 사회적 시스템이 함께 작동해줘야 돼요. 마음을 다독여줘야 되고, 경제적으로 너무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복지 시스템도 같이 작동돼야 하죠.

 

재심 사건의 변론을 결심할 때 “느낌을 가장 먼저, 그 다음에 기록”을 본다고 하셨는데요. 한편으로는 ‘느낌이라는 것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일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른 걸 이야기하는 게 사람인 건 맞아요. 내면과 외면이 다른 경우가 충분히 있어요. 그런데 그게 길게 가는 경우는 드물 수 있거든요. 억울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시간과 돈을 들여서 억울하다는 주장을 계속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어느 정도 이 사람이 고통을 호소했는지 시간을 봅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도 중요해요. 그런 전제가 깔려 있고요. 절절함이라는 것은 글이나 말, 또는 표정에서도 묻어나올 때가 있어요. 꼭 기록을 보지 않아도 ‘정말 억울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진실을 이야기하는지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어느 정도 ‘감’이 오는 걸까요?


스스로 절절함을 연기했다 하더라도, 사람을 몇 번 만나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보면서 이야기할 때는, 위선적인 사람은 잠깐이라도 시선이 돌아갈 때가 있어요. 이 사람은 뭔가 감추고 있구나, 라는 게 느껴지는 타이밍이 있어요. 그 직감을 너무 우선시하면 안 되지만 그 사람의 억울함을 호소한 시간과 수단, 그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들, 그런 ‘감’이 때로는 기록보다 더 강렬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제가 맡았던 사건들은 수사 기록이 조작된 경우가 많거든요. (심지어) 삼례 익산 사건은 진범이 따로 있는 사건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보면 범인만이 할 수 있는 진술들이 들어가 있어요. 조작되어 있으니까요. 그 기록은 사실이 아니잖아요. 기록의 이면을 보려면 사람을 봐야 되거든요. 그걸 보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거예요.

 

삼례 사건과 관계된 분들이 보여주신 행동은 쉽게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진범도 용기를 내서 나타나 줬고, 피해자 분들은 그 분을 만나서 사과를 받아줬잖아요. 모두가 진실을 위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줬어요.


진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피해자) 최성자 선생님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질지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분이 사건으로 얻으신 트라우마가 얼마나 크겠어요. 하지만 그 사람(진범)을 만나서 용서하고 손을 잡아줄 때, 물론 진실도 좋지만, 마음이 편안하다는 거죠. 저희가 다 같이 만났을 때 최 선생님이 먼저 현장을 떠나셔야 했는데, 그러고 나서 저한테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어요. 그냥 (진범의) 옆에 가서 이제 마음 놓고 살라는 이야기를 못해주고 와서 마음에 걸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문자메시지를 보내주시라고, 그대로 전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삼례 사건의 진범에게도 변화가 있었나요?


진범도 마찬가지예요. 진실도 중요하지만, 예전에는 악몽도 꾸고 고통 속에 살았는데 지금은 악몽을 꾸지 않는데요. 내 마음의 평안이 그렇게 와요. 남한테 사과를 하고 남을 용서해주면서요. 연대라는 게 왜 중요한지 아세요? 제가 여러 사건을 맡아서 변호하다가 보니까, 누군가 한 사람이 먼저 용기를 내주면 그 다음 단계로 계속 발전해요. 정말 설득이 어려운 사람도 ‘다른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합니다’라고 말해서 설득했다니까요. 그러니까 단계를 밟아가는 거죠. 용기라는 게 그렇게 나요.

 

『우리들의 변호사』에서 재판 과정에서 목격하신 부조리, 절차상의 한계를 이야기하기도 하셨어요. 어떤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보세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민주적인 사법 절차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수백 년의 사법 제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에서도 오판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민주적 사법 제도가 작동한 게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나라에서 완결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절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바꿔보려고 외국에서 많은 제도들을 보고 가지고 오는데, 그게 우리나라 실상에 맞지 않는 경우도 너무나 많아요. 현실에 맞지 않는 제도들이죠. 운영 과정에서 당초 제도의 취지와 반대로 운영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봤고요. 그래서 저는 여기에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먼저 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무조건 보고 들여올 게 아니라 우리 현실에 맞는 것인지, 현실에 맞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계속 체크해 나가는 게 필요해요.

 

시민들의 인식도 달라져야 할 부분이 있겠죠?


진범이 따로 있는 사건이 17년 만에 해결됐어요.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사건이고, 어떻게 이런 사건이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될 수가 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죠. 그런데 실제로 해결이 안 돼요. 대법원에서도 재심을 기각해 버린 사건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해결이 안 됐는지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가 작동을 하다가도 끊기는 시기가 굉장히 많았어요. 관심의 지속이라는 게 중요하거든요. 관심만 계속 갖고 있다면 그 관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은 바로잡아요.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서 각각의 영역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게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서로 다른 영역 사이의 연대도 필요하겠네요.

 

상대방의 영역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어도 불합리하고 문제되는 것에 대해서 같이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거든요. 그게 연대의 힘이고, 그게 중요하다고 봐요. 작은 힘이 모여서 세상을 바꿉니다. 이번에 탄핵 절차까지 가게 된 과정을 봐도, 결국은 시민들의 연대의 힘이 이뤄낸 거잖아요. 잘난 사람들의 호령은 아니었거든요.


 

 


우리들의 변호사박준영 저 | 이후
시국 사건도 아니고, 일반 형사 사건의 재심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고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청구를 성공시켰다. 그것도 몇 건이나. 박준영이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나라 사법 역사의 새로운 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