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다섯 번째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 이슬처럼 영롱한 시편들
아침 5시,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자 유튜브를 켜고 장사익 노래, 서정춘 작시의 <여행>을 듣는다. 물결치듯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울렁임. 서정춘 시가 장사익 소리꾼의 영혼에서 여과되어 지리산정의 약수처럼 맑디맑은 물방울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 청정한 새벽 물방울을 받아마시며 아침을 연다. <竹篇> 시인으로 유명한 그가 최근 다섯 번째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를 펴냈다. 다작(多作)이 유명세처럼 판치는 세상에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한국시단의 중심 반열에 서 있는 서정춘 시인이 이제 겨우 다섯 번째 시집이라니 의외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를 잘 아는 문단식구들은 조금도 놀라지않는다. 과연 서정춘답다고 말한다. 시 한수 한수에 보석을 박듯 시집 한권 한권에도 절차탁마한다. 옥돌을 수백수천번 다듬고 갈아 빛을 낸다. 참으로 귀한 시집이다.
무크誌 대밭이다 세로쓰기 一行詩다 일세를 풍미한 숨가쁜 문장이다 구구절절, 긴 문장은 잘라 읽어도 좋겠다
<대나무2> 전문
이경철 시인(문학평론가)은 서정춘 시인의 대표작 <竹篇>에 대해 “등 구부려 피곤한 몸 누인 기차 대합실. 칙칙폭폭 십 년인가 백 년인가 멀고 아득타, 함께 웃고 울며 살고 지는 고향 길은. 울먹이듯 쉰 목청으로 가난이야 가난이야 가난 타령 잘도 부르는 시인. 짧게 텅 비운 감동 먼 시공(時空) 울린다. 정(情)과 한(恨)의 이 땅 오천 년 소리꾼 장사익도 화답한 시. 푸른 댓잎 같은, 누런 대통 같은 장사익 소리 따라 읽으면 우리네 한도 이리 맑은 서정인 것을. 꿈속에서라도 푸른 기차 타고 대꽃 피는 고향 가 어우러지소서”라고 말한다.
시인 정지용은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로 말을 달리고 남루도 추울 것도 없는 마흔 몇 살 홀아비는 말구루마를 끌고 구례 장날을 돌아와선 오두막에 딸린 마구간을 들 때면 나는 조랑말의 차디찬 말방울소리에 귀가 시려 잠 못 이룬 겨울밤이 있었다
<꿈 속에서> 전문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최근 “마부였던 ‘마흔 몇 살’ 아버지가 늙은 시인의 꿈속에 나타났다. 세월이 흘러도 아버지는 늙지 않고 시린 말방울 소리 자욱하게 아들의 꿈속으로 온다. 워낙 가진 것이 없어 ‘남루도 추울 것도 없는’ 아버지는 시인 아들을 둔 덕에 21세기의 독자들을 갖게 되었다. 시는 기억을 통해, 잊힌 서사(敍事)를 현재로 호출한다. 그가 걸었던 구례 장날과 하동 섬진강 가에 지금도 눈 내리고, 매화 그늘 그윽하다”고 평한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나도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다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들어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이슬에 사무치다> 전문
김사인 시인은 “사무침은 근본주의보다 더한 소통이다. 그럼 서로 ‘사무침’은 어떤 경로로 이루어지는 걸까? 서정춘의 시 ‘이슬에 사무치다’는 그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 참다운 교감의 몸가짐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슬방울을 향해 시의 주인공이 어떻게 사무침을 시도하는지 잘 맛보시길 바란다. 그 구애가 얼마나 애틋한지, 이슬방울과 함께 얼마나 천진무구한 황홀경에 빠져들고 얼마나 몸과 마음을 진하게 섞는지 잘 음미하시라. 그리고 서로 사무침을 이루는, 그 마음의 기술을 눈여겨보시라”라고 말한다.
말이 달린다 다리다리 다리다리
말이 달린다 디귿리을 디귿리을
말이 달린다 ㄷㄹㄷㄹ
<소리2> 전문
서정춘 시인은 작은 거인이다. 몸집도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그의 시는 짧지만 철검처럼 날카롭기 그지없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다. 몇줄 안되는 짧은 행간에 우주가 숨어 있고, 인간 희로애락의 은유와 사상이 심연처럼 깊다. 2014년 <백자예술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장인 허영자 시인(전 한국시인협회장)은 심사평에서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는 천생의 예술가, 천품의 시인이 더러 있다. 서정춘 시인은 흔치않은 천성의 시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 분의 시에서는 실로 예리한 감각, 민감한 감성, 깊은 통찰력, 전광석화 같은 직관력, 따뜻하고 순수한 심안, 그리고 착한 삶을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한다. 허영자 시인은 또 “운율이 시의 한 특성이라고 함은 상식이다. 서시인의 시에는 그 만의 가락이 있다. 그 가락이 흥이 되고 내용에 걸맞는 옷이 되어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순수서정에의 지향이 서 시인 시의 주된 정신인 점도 요즈음 시류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찬양도 비판도 저항도 은유와 상징이라는 정서의 순화를 거치고 무섭게 가려뽑은 시어로 응축시키는 시인의 전인적 투척이 놀랍다”고 강조한다.
일찍이, 젖배곯이였던 말라깽이 서정춘이 그 작은 키로 관악산 바위에 올라 삐딱하게 걸터앉은 흑백사진 한 컷!! 흡사, 바위에 들러붙어 알탕갈탕 안 죽고 사는 꼴통조선 솔낭 구 같다면서 사진가 육명심이 찍어 준 저 배고픔의 전과자, 흑백사진 한 컷!!
<꼴통사진> 전문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곳/그곳이 고향이란다’<30년 전, 1959년 겨울>에서 보듯이 서정춘 시인의 시의 원류는 고향과 배고픔이다. 그는 늘 낮은 자세로 어릴 적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않는다. 육명심 사진가는 1972년 서라벌예대 사진과 교수를 시작으로 신구대학 사진과 창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창설 등 한국 사진계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육 교수는 종종 가장 서정춘다운 사진은 ‘배고픔의 전과자’다운 이미지일 거라고 말한다.
이번에 <글상걸상>에서 펴낸 시집 <이슬에 사무치다>는 책 제본에서도 특별하다. 한지 형식의 표지 장정에 하루 15권 정도 만 만들 수 있는 수제본이다. 표지 제호는 서정춘 시인이 직접 썼고, 내표지에는 자화상도 그려넣었다. 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아하, 나는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라고 말한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썼다니...역설이 또 한번 필자를 놀라게 한다.(글/임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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