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이 오자 시인은 “가자” 하고 말했다. 시인이 가자는 곳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일컬어지는 심원마을이었다. 심원마을은 지리산 반야봉(해발 1732m)과 노고단(1507m), 만복대(1438m) 사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오지이다.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될 무렵이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오고 길이 뚫렸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은 친구들이 많이 모이기로 했다. 장수에서 ‘하늘내 들꽃마을’(농촌 체험마을)을 운영하는 후배도 오고, 작곡가 보리님과 함께 남준 형의 시를 작업하는 가수 진진도 딸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나는 늘 지리산 내려갈 때마다 준비하는 ‘메이드 인 서울’ 케이크와 커피를 준비했다.
산꼭대기라서 그랬기도 했지만 날은 아직 추웠고, 며칠 전에 내린 눈으로 도로 곳곳은 빙판이었다. 우리는 서울에서 부지런히 떠났기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지리산에 다다랐다. 구례에서 천은사를 지나 심원마을로 오르는 길로 들어서기에 내가 일행을 꼬드겼다. 심원마을 가기 전에 있는 해발 1100m 성삼재휴게소의 막걸리를 맛보고 가자는 아주 바람직한 제안에 일행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성삼재는 마한 시대에 성이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이 재를 지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나는 예전에 ‘낙장불입 시인’(이원규)과 함께 한여름 지리산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아직 에어컨이 없던 집에서 시인은 “더우면 올라간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때 시인을 따라 올라오니 정말 좋았다. 물론 아주 사람이 많았지만 말이다.
평일, 그것도 눈이 그친 지 며칠 뒤의 휴게소는 아주 한산했다. 우리는 휴게소의 통나무보다 더 크고 둥근 통나무 난로 옆에 앉아 도토리묵과 막걸리를 먹었다. 창밖으로는 파도치듯 굽이굽이 산맥들이 밀려오는데 등 따신 난롯가에서 먹는 찬 막걸리라니. 나와 함께한 젊은 <한겨레> 일행들은 이 세상에 이런 무릉도원적 경지가 있다는 생각에 아마도 긴 운전의 피로도 잊은 듯했고, 나는 또 나대로 이런 경지를 전수해준다는 생각에 흐뭇할 따름이었다.
약간의 알코올과 향내 나는 도토리묵을 먹은 우리는 약속된 장소인 심원재 초가집으로 갔다. 일행들은 벌써 와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반기는 백효준 사장님 겸 요리사 겸 재료 채취가는 벌써 상을 차리고 계셨다. 단언컨대 뉴욕이나 파리로 가서 이 식당을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연다면 틀림없이 대박이 날 것이었다. 먼저 나물은 산취, 쑥취, 지리취, 곰취, 선비나물, 신선초, 뽕잎, 죽순, 목이, 바디나물, 선비대, 고사리, 질경이…. 그게 그건 것같이 보여도 맛과 모양이 다 다르다. 광주에서 살다가 1984년, 지금은 서른다섯이 된 아들을 들쳐업고 산이 좋아 이곳에 정착했다는 백 여사.(가만 요즘은 백씨들의 요리가 대세일까?) 그녀는 봄이 되면 주말에만 장사를 하고 나머지 평일은 나물을 캐러 다닌다고 했다. 나는 그저 채식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결코 아닌데도 이 나물 맛은 기가 막혔다. 백 여사께 살짝 비결을 물었다.
보드랍고 씁쓸한 나물 성찬에
맺힌 혈 풀어주는 마가목주 한잔
친구들과 달맞이하다 생각한다
이걸로 충분하다, 참으로 충분하다“먼저 냄비에 물이 끓으면 마른 나물을 넣었다가 바로 꺼낸다는 기분으로 데쳐요. 그리고 찬물에 5~6시간 담가놓는 거야. 담에 깨끗이 씻어서 건져. 프라이팬에 미리 만들어놓은 국물, 그러니까 무, 표고버섯, 다시마 넣고 푹 끓인 거…. 여기에 메루치(멸치)는 안 들어가요잉. 국물을 나물이 폭폭하게 잠길 정도로 잘박하게 붓고 집간장하고 식용유로 볶아. 절대 빡빡하게 하면 안 돼이. 나물이 젖어들도록 볶다가 거의 물이 졸아갈 때 불에서 내린 후에 참기름하고 참깨를 넣어주면 돼요. 들깻가루는 죽순, 표고, 목이, 토란대에 넣고 말이제.”
나물로 푸짐하게 차린 식사를 즐기고 있는 거제의 제이(왼쪽)와 박남준 시인.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나물은 보드라웠고 삼삼하게 간이 맞았으며 목 넘길 때 씁쓸한 향이 이 세상 어떤 요리보다 맛이 있었다. 간장은 고로쇠 물을 쓰고 숯 대신 옻나무를 쓴다니 특별하기도 했다. 직접 쑤었다는 도토리묵은 보드랍고 고소했다. 가뜩이나 먹을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말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최 도사 형이 술을 한잔 권했다. 지리산 마고 할매처럼 손이 크고 인심이 좋으신 백 여사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마가목주였다. 혈액 곳곳에 맺힌 혈을 풀어주어서 일명 ‘안티프라민주’라고 불린다는 마가목주는 입에 달았다. 나물의 제왕이라는 병풍치(해발 1200m에서만 자란다), 생강나무순, 그리고 삼채(다시마, 인삼, 산마늘 맛이 다 난다고 해서 삼채다), 산뽕나무 초절임은 또 어떤가? 고추장·된장박이와 청국장은…. 아니 게다가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지어 돌솥에 나오는 석이버섯밥이라니…. 내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자 최 도사 형이 불쑥 말했다.
“꽁지 너는 맛없다는 게 없잖아.”
“쳇, 무슨 소리야? 내가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대신 나는 맛없으면 안 먹어.”
내가 대꾸하자 최 도사 형이 다시 말했다.
“그런 게 없던데? 다 잘 먹잖아.”
“맛없으면 조용히 숟가락 놔버리지, 내가 맛없다 하면 다른 사람까지 입맛이 없잖아. 내가 다 착하니까 그러는 거지.”
최 도사 형이 뭐라고 다시 말하려고 하자, 거제의 제이(J)가 끼어들었다.
“아유, 도사 형. 꽁지 언니 오늘은 봐주자. 언니야 많이 힘들다.”
내가 문득 고개를 들자 사람들의 분위기가 일순 조용해졌다. 이곳에 모이기 전날, 면직된 신부가 명예훼손으로 날 고소한 사건이 유죄 취지로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것이 모든 신문과 방송에 크게 났기 때문이었다. 이미 만 하루 동안 참선과 기도와 성질과 성토 그리고 수다를 통해 마음을 비운 나는 이 상황이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만에 받아보는 동정 어린 우호적 분위기란 말인가.
“언니야, 맞아. 언니 언제나 남 배려하고 그러는 거 오늘은 자랑해. 까짓것 해.”
그러자 문득 아까 진진의 4학년짜리 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에잇, 자랑하라는데 뭐, 싶어 나는 더 나갔다.
“그리고 아까 진진이 딸이 제이에게 말하는 거야. ‘아줌마, 왜 배가 그리 나왔어요?’ 내가 착해서 거기 끼어들며 ‘응, 얘야 나이가 들면 원래 배가 나오는 거야’ 하니까 진진 딸이 나보고 ‘그런데 아줌마는 안 나왔잖아요?’ 하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응, 아줌마는 요 며칠 기가 막혀서 나왔던 배가 잠시 들어갔어’ 이랬다는 거 아니야. 하하하.”
내가 큰 소리로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착하고 배려심 깊은 제이만 “그래그래. 맞아 맞아” 하고는 말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마가목주만 연신 비웠다.
세상 어디에서도 얻지 못하는 이상한 연민과 속 깊은 동정을 나는 이곳에 오면 얻는다. 사람을 돈으로 평가해서가 아니라 연봉 100만원이 안 되는 백수인 최 도사는 물론, 관값 300만원을 어떻게든 잔액으로 남기려고 애쓰는 버들치 시인도 그렇다. 마치 친정에 온 듯한 기분이랄까. 이곳에서 나는 언제나 도시의 비정함에 자주 맘을 다치는, 서울 간 여동생 같은 눈길을 받으니까 말이다.
그날 밤 달이 떴다. 달 옆의 목성도 떴다. 우리는 백 여사가 숯불에 구워주는 닭구이를 먹으며 덜덜 떨며 달맞이를 했다. 달의 뒷면을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안다. 이곳에서 이 좋은 친구들은 내 뒷면을 안다는 것을. 보지는 못했겠지만 어여삐 여겨준다는 것을. 이것이 우정이라고 나는 그날 달을 보며 문득 생각했고, 찬 대기 속에서 그들과 소주잔을 부딪혔다. 쉰이 넘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날마다 더 절감하는 나는 생각했다. 충분하다, 참으로 충분하다, 하고.
공지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