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답사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은 공칠과삼, 구동존이 같은 마음자세이다. 그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사람마다 책임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거리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유책’, ‘문명창달 인인유책’ …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도 인인유책이다.
중국이 무섭게 변하며 우리에게 한껏 가까이 다가와 있다. 조만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시행에 들어갈 것이다. 연일 중국의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소식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밀려드는 유커들이 과연 주머니를 얼마나 여느냐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돌이켜 보건대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죽의 장막 속에 닫혀 있던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중국은 적성국가 중공이었을 뿐이다. 그러다 70년대 말 등소평(덩샤오핑)은 백묘흑묘론을 내걸고 개방을 추진하였다. 활짝 연 문으로 들어오는 파리 모기는 때려잡으면 된다면서 80년대에는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중국은 그 옛날의 대국이 아니었다. 1억명을 부자로 만들어 그들이 나머지 10억명을 먹여 살리겠다는 비전만 갖고 있던 때였다. 90년대만 해도 그들은 한강의 기적을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우리나라를 본받고 있었다. 그 무렵 중국에 답사 갔다가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 “한국식 최신공법 시공”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만감이 교차했다.
그렇다고 중국이 대국으로서 존엄까지 포기하고 자본만능으로만 치달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이 야심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를 보면 그들의 경제적 문화적 부흥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내가 중국을 답사하면서 감동받은 것은 만리장성이나 자금성 같은 장대한 문화유산보다도 대국다운 그네들의 마음 씀씀이였다. 천안문 광장에 여전히 모택동(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부터 그러했다.
10년간의 끔찍스런 문화대혁명으로 나라를 망조로 만든 모택동이 죽고 사인방도 마침내 처단되었을 때 모택동에 대한 격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새 지도자로 등장한 등소평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들고나왔다. 모택동은 ‘공로가 7이고 과오가 3’이라며 ‘모택동의 과오에는 나의 과오도 들어 있다’며 끌어안고 갔다. 참으로 대륙적이고 대인다운 포용력이었다.
중국은 2000여년간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온 역사적 경험 속에서 이런 대국적인 너그러움을 키워왔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을 때 제3세계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피해를 입었지만 국가마다 사회체제를 달리하여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때 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는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제시하였다. ‘같은 것은 함께 추구하고 다른 것은 다름으로 남겨두자’는 것이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 협상 때 시진핑 주석이 제시한 기조도 이 구동존이였다.
중국은 국가 조직의 틀도 견실한 나라다. 10년 전 얘기다. 문화재청장 시절 중국 국가문물부 초청으로 북경(베이징), 서안(시안), 남경(난징)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손님맞이 방식에 놀라고 말았다. 5박6일간 나의 일정은 분 단위로 짜여 있었고, 유적지, 연구소, 박물관을 방문할 때의 동선과 배석자의 명단은 물론이고 유물해설사까지 미리 선발되어 있었다.
나를 엿새간 동행하며 안내한 분은 문물연구소 부소장이었다. 방문하는 도시에선 시장 또는 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반드시 오찬이나 만찬에 초대하였다. 서안으로 가면서 내가 안내인에게 현장법사의 대안탑을 방문하게 되면 저수량의 비문 탁본을 구할 수 있냐고 묻자 서안 시장이 내게 줄 선물이 바로 그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준비해간 내 선물이 부끄럽기만 했다.
모든 게 상상 밖이었다. 만약에 내가 중국에서 온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했다면 사대주의적 태도라고 맹비난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이른바 의전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신들도 똑같은 경험을 했었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면 하등 꿀릴 게 없는데 의전을 갖추고 국가 대 국가로 상대하고 나오면 주눅이 들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사신들이 그래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학식과 시문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의전에 기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화를 할 때면 내가 잘 아는 미술사 얘기로 화제를 이끌면서 친선적 분위기를 유도했다. 북경에선 부시장이 초청한 만찬이 있었다. 안내인이 나를 소개하며 유명한 저술가라고 하자 부시장은 나에게 “유 청장님. 북경을 위해 좋은 글 하나 써 주십시오”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나는 그들 기분 좋으라고 최대의 찬사를 적었다. “북경이 중국이다.” 이에 힘찬 박수를 받으며 만찬을 마쳤다.
다음날 서안에서는 시장이 마련한 오찬이 있었다. 안내인은 덕담을 한답시고 내가 “북경이 중국이다”라는 명구를 남겼다고 치켜세웠다. 그러자 시장은 서안을 위해서도 한마디 써달라며 방명록을 내놓았다. 무어라 쓸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의 수도가 서안이 아닌가. 나는 자신 있게 써 내려갔다. “서안이 있어서 중국이 있다.”
남경에서는 시인민위원장이 마련한 만찬이 있었고 안내인은 칭찬이랍시고 북경과 서안에서 내가 방명록에 쓴 글을 얘기했다. 그러자 위원장은 남경을 위해서도 한마디 남겨달라는 것이었다. 남경은 남북조시대 때 여섯 나라의 수도였던 ‘육조고도’이고 신해혁명 후 손문(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도로 삼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남경이 일어날 때, 중국이 일어났다.”
이렇게 중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데 그동안 안내를 맡았던 연구소 부소장이 자기 고향인 상해(상하이)를 위해서도 한마디 써 달라고 했다. 나는 서세동점 시절 어지러웠던 상해를 생각하며 한 자 적어주었다. “상해가 흔들리면 중국이 흔들린다.”
방명록 덕분인지 모든 일이 잘 풀렸다. 귀국 후 나는 중국의 완벽한 의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오랜 기간 주변의 55개 민족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온 역사적 경험에서 이룩한 형식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의전과 비교해보면 마치 대대로 봉제사 접빈객을 해온 양반집과 어느 졸부집의 손님맞이 차이 같다고나 할까.
오늘날 중국은 마침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그들이 원한 대로 대국으로 굴기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걸음걸이도 말하는 폼도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미사일 배치 문제를 놓고 미국에 강력한 견제구를 던지기도 하고, 과거사 문제를 놓고 일본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남북한 양쪽 모두에 친선적 제스처를 쓰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는 능숙한 외교술도 보여준다.
이제 중국은 다시 강대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위상은 어떻게 되나. 그 옛날의 한-중 관계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다. 당당히 말하건대 우리도 만만치 않은 존재감이 있다.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의 성취는 중국이 더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현지 공장을 갖고 있고 한류도 깊숙이 흘러 들어가 있다.
중국은 우리와 함께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동반자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당당히 나아가야 한다. 나라 밖을 바라보면 상황이 이처럼 중차대한데 작금의 우리 정치는 정파적 이해에 얽매여 있고, 사회는 진보 보수로 편을 가르는 부질없는 분열에 휩싸여 있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
이제 우리는 두 눈을 멀리 내다보며 나라를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골수병에 가까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유력한 처방전이다.
내가 중국을 답사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공칠과삼, 구동존이 같은 마음자세이다. 특히 그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인인유책’(人人有責), 즉 ‘사람마다 책임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거리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유책’, ‘환경보전 인인유책’, ‘문명창달 인인유책’ …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도 인인유책이다. 사람마다 책임 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