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잔꽃송이

[스크랩] 풍악재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나나수키 2013. 4. 28. 16:27

 

* 풍악재라는 이름의 집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내가 사는 악양 오가는 길가에서 만나면 수인사를 나누거나 미소의 목례를 건네는,

조금은 알고 지내는 이들이 집에 찾아왔다. 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 아마 처음이었던가.

아무튼 뒤뜰 원두막에 앉아 평소에는 여간해서 하지 않는 낮술을 했을 것이다.

대개의 술자리라는 것이 그러하듯이

조금쯤 서먹서먹하던 관계들이 친밀해지자 나를 찾아온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이라는 지역 시민단체에서 겨울 쯤 날을 잡아

농산물 직거래 장터를 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찾아온 이들 중에는 귀농을 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농협 같은 곳에서 주축이 되어 열리는 농산물 직거래장터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작은 잔치의 성격을 가진 장터를 만들려고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수를 초청하고 싶다고요.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데요?”

“한영애나 정태춘 박은옥, 강산에, 장사익...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두 사람 불렀으면 해요.”

“음, 꽤 비쌀 텐데 그런데 총 행사 비용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어요?

직거래장터를 여는 행사비용 말이에요.”

“1박 2일로 열려고 하고요. 전체경비를 대략 200만원에서 300만원정도 잡고 있어요.”

“뭐라고요?”

 

기가 찼다. 말문이 막혔다.

언급을 하며 초청을 하고 싶다는 가수 한사람을 부르는데도 그 몇 배가 드는데

이 사람들 도대체 현실감각이 없군,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 가수들 중에는 꽤 가깝게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행사비용이다.

다시 농산물 직거래장터를 왜 열려고 하는지, 잔치의 성격을 되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성격이라면

오히려 가수들을 초청하기보다는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차라리 밴드를 만들어보면 어때요?”

함께 찾아온 이들 중에 옻칠을 하는 이의 집에서 술자리를 하며 기타를 치고

노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었다. 그이의 집은 마치 작은 음악연습실처럼

노래방 기기와 몇가지 음향기기들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는 내가 보기에 실력이 썩 괜찮은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 자리가 정말이지 흥겨웠다는 것이다.

그런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몸과 마음속에 그런 신명을 모시고 사는 이들이라면

가수를 초청하는데 돈을 들이지 말고 비록 어설프고 서툴지만

밴드를 만들어서 함께 즐기는 것이 잔치의 성격에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문화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작은 혁명이고 역모인 것이다.

밴드를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어리둥절하는 듯 하더니

너나할 것 없이 곧바로 그 유쾌한 반란에 한바탕 즐거운 웃음보를 터트리며

서로의 동의를 다지는 눈도장을 나누기에 바빠졌다.

“밴드를 만든다면 그럼 밴드 이름도 있어야 잖아요.”

“에이 동네사람들이 하는데 뭐 이름을 따로 생각할 것이 있나 그냥 동네밴드라고 하지 뭐 어때?”

그렇게 해서 이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 동네밴드가 태어났다.

 

내가 밴드를 만들자고 한 생각은 사실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그 성격은 다르지만 임순례감독의 영화 와이키키브라더스에 대한 기억과 함께

지리산을 끼고 있는 행정지역인 5개 시군,

그러니까 남원시, 구례군, 하동군, 함양군, 산청군에서 돌아가며 열고 있는

지리산문화제의 영향이 크다.

처음 그 시작은 구례의 산동마을에서 열렸는데 케이블카와 골프장유치문제를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 현장마을의 논바닥에 볏집으로 무대와 객석을 만들어

무조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마을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알리는데 비중을 둔 문화제였다.

재작년 하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19번 국도를 확장한다는 문제로,

그리고 올해는 함양의 골프장문제 등

첨예하게 대두되는 현장문제를 가지고 있는 지역을 찾아가며 열리는 지리산 문화제는

관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만들어가는 문화예술제인 것이다.

그 지리산문화제가 재작년 하동의 악양에서 열렸을 때 나는 무척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산청의 한 산골마을에서 온 얼레기밴드라는 그야말로 어설픈 밴드가 출연을 했는데

그 구성원들이 다양했다. 이제 초등학교 학생에서부터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는 사이라는 가수에 이르기까지,

좀 얕잡아서 말하자면 재롱잔치 같은 실력으로.....

내가 밴드를 만들면 어때? 라는 발상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동네밴드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오고가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왜 한번도 와보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밴드를 만들어서 한참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옻칠을 하는 친구의 집에 갔다. 놀러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습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실의 이런저런 공구와 기계들을 모두 한쪽으로 치우고

악기들을 들여놓아 연습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비좁았겠는가.

구성원들을 보니 이미 기타는 퍼스트, 세컨, 베이스 모두 꽉 찼다.

드럼도 있다고 한다. 키보드가 없어서 고민을 했는데

하동읍내에서 치킨 집을 하며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친구의 딸이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해서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지금 고3이라서 수능이 끝나면 합류한다고 한다.

보컬이 따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보컬을 지원했다.

2명이 경합을 하며 3곡씩 노래를 불렀는데 두 사람 다 떨어졌다.

나도 밴드를 하고 싶었는데 실력이 되지 않으니 어찌 우겨볼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섭섭하고 괘씸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끙끙대며 아궁이에 불을 때다가 떠올렸다.

그래 하모니카, 초등학교 학예회를 할 때 하모니 불렀었는데

동네밴드에 하모니카가 있으면 어떨까?

한의사를 하는 친구에게서 손바닥만한 작은 하모니카가 신기해서 뺏어온 것이

어디 있을 것이란 생각이 났다. 불을 때다 말고 들어와 찾았다.

두어 곳, 소리가 좀 으깨어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불만 했다.

아궁이 앞에 앉아 동요를 불러보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전화를 했다.

한번 들어봐.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어때?

아마 그때 잘 생각은 나지 않지만 동요에 이어 이미자의 뽕짝을 한곡 슬쩍 끼워 넣었을 것이다.

동백아가씨였던가.

“괜찮을 것 같네요. 오늘 드럼도 오고 수능시험 끝났다고

키보드도 처음 합류를 해서 연습을 하니까 와 봐요.

마침 하모니카가 들어가는 곡도 있는데 집에 한 대수의 ‘바람과 나’라는 곡 있으면 들어보고 와요.”

“음 하모니가 들어가는 곡은 없는데 어쩌지?”

“그럼 여기 컴퓨터에 있으니까 하모니카만 들고 오세요.”

그렇게 해서 동네밴드에 하모니카로 겨우 한자리를 끼어들었다.

 

작년 12월 6일, 동네밴드 겨울나들이라는 제목으로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의 작은 농산물 직거래 장터가 경향각처에서 몰려온

구름같고 벌떼같은 인파로 북적거리며 무박2일, 함께 흥겨웠다.

돼지도 잡고 농사를 지은 쌀로 떡도 하고 두부를 만들었으며 직접 술을 빚어 그 잔치에 내놓았다.

공연이 끝나고 초등학교 아이들이 자기들도 밴드를 만들겠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자존심이 있다고 한사코 동네밴드 주니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그룹사운드 동네친구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나중에 으름장과 협박으로 주니어라는 이름을 쓴다)

젊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은 <필>이라는 통기타반, 줄여서 <필통기타반>을 만들었다.

작은 산골마을에 악단이 세 개나 조직이 되었다.

 

연습실이 필요하게 되었다. 필요한 땅을 내놓겠다는 사람이 손을 들었다.

첫 월급을 내놓겠다고, 돈은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고, 10만원씩 적금을 붓겠다고,

건축자재를 기증하겠다고, 설계를 해주겠다고, 저요저요 손을 들었다.

신문기사를 보고,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고 후원을 해주신 분들,

새참을 내어 오시고 틈틈이 시장을 봐와서 밥을 해주신 이,

그 고마움을 어찌 이루 다 말로 할까.

처음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놓자는 의견에서 7평, 9평, 12평, 15평,

연습실의 평수가 늘어나더니 아이들의 놀이방을 겸하고

젊은 어른들의 사랑방과 밴드 연습실을 겸한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의 사랑채는

18평으로 지어졌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고마움과 사랑, 고된 땀으로 지어진 집,

내가 사는 악양에는 풍악재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올해도 작은 농산물 직거래장터와 동네밴드 공연이 12월 12일 악양에서 열린다.

끙, 이제 다 틀렸다. 이사가기는 영 물건너갔다. 결국 여기에서 뼈를 묻게 되겠구나.

공동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사람, 한사람, 맑은 영혼들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래, 이런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이루어나가는 삶이 바로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열린 공동체, 풍악재라는 이름의 집.

 

섬지사 식구님들아 사랑헌다고요잉~

출처 :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
글쓴이 : 동쪽매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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