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로 400번 돌파를 기념했던 창비시선이 김용택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를 401번으로 선보였다. 400번대의 시작에 즈음해 표지 디자인도 단순하고 추상적인 이미지 위주로 바꾸었다.
김용택의 시 역시 연속성 속에 중요한 변화가 만져진다. 고향 섬진강변 진메마을 주변의 자연을 줄기차게 노래해 온 그의 시에 내면이 성큼 들어선 것이다.
“어느날이었다./ 산 아래/ 물가에 앉아 생각하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또 있겠지만,/ 산같이 온순하고/ 물같이 선하고/ 바람같이 쉬운 시를 쓰고 싶다고,/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바람의 괴로움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오래 하였다.”(‘오래 한 생각’ 전문)
여전히 산과 물과 바람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시인 바깥의 ‘스스로 그러한’ 자연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쓰기와 사랑의 아픔, 괴로움으로 전이되며 결국 ‘나’의 ‘생각’으로 수렴된다. “한번 그래 보았다”(‘한번’)라든가 “생각난 김에 적어둔다”(‘생각난 김에’) 같은 종결부 표현은 주체의 강력한 의지적 작용을 겸손으로 포장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은 70년 가까운 인생살이의 중간 결산으로 읽히는 ‘그동안’에서 더욱 더하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살았다./ 글을 썼다./ 쓴 글 모아보았다./ 꼬막 껍데기 반의반도 차지 않았다./ 회한이 어찌 없었겠는가./ 힘들 때는 혼자 울면서 말했다./ 울기 싫다고. 그렇다고/ 궂은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다./ 살았다.”(‘그동안’ 전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무엇보다 그냥 “살았다”는 것보다 더한 자부의 말이 달리 있겠는가. 이 시를 비롯해 김용택의 많은 시들은 ‘무기교의 기교’라 할 법한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지난 4월, 20년 만에 고향 마을로 다시 들어온 김용택은 “내 인생이 시작되었던 곳에 도착한 셈이다. (…) 홀로 멀리 갈 수 있다”(‘시인의 말’)고 썼다.
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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