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소’ 한 마리를 끌고 북한에 들어가고 있다. 정 회장은 새끼를 밴 소를 포함해 1001마리의 소떼를 끌고 북한으로 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금강산 개발 의정서를 받아 왔다. |
[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⑮ ‘통일 할아버지’ 정주영
1989년께의 일이었을 것이다. 요즘에야 후보자가 나서고 선거가 치러지면 다행일 지경인 대학이 많다지만 당시의 대학 총학생회 선거는 가히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에 뒤지지 않을 만큼 불꽃이 튀는 진검승부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후보들의 유세장은 진지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한 방송사에서 중견 기자로 활약하고 있는 한 총학생회장 후보가 ‘통일운동’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던 상대편 진영을 빗대 이렇게 비꼬았다.
“임수경 학생이 통일의 꽃이라면 정주영은 통일의 할아버지란 말입니까?”
그 말이 나오자 유세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싸늘해졌고, 나는 몇몇 학생이 욕설을 뇌까리며 엉덩이를 털고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필경 격노한 학생의 속내인즉슨 어디에 누구를 갖다 붙이느냐는 것이었을 것이다. 정주영, 그런 나쁜 사람을 어딜 ‘통일의 꽃’에 갖다 붙이느냐는 항변이었을 터이다. 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다녀온 임수경은 통일운동의 상징이자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고 문익환 목사)으로서 추석날 총학생회에서 마련한 귀성차량 창문에 덕지덕지 사진을 붙여 가며 칭송(?)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 가서 자그마치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하고 금강산 개발 의정서까지 받아 온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을 “통일의 할아버지”에 빗댄 것이 그 학생들은 왜 그리 불편했을까.
“혁명 나면 숙청될 빅3 중 하나”라는 농담
80년대 말 90년대의 ‘현대특별시’ 울산은 그야말로 한 시대의 자본과 노동의 예봉이 격렬하고 첨예하게 맞붙고 충돌하던 최전방 최전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지만, 현대중공업의 경우 그 최전방 중에서도 전투가 불을 뿜는 위험지대였다. 1988년 겨울 현대중공업 사측 경비원들이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의 옆구리에 식칼을 박아 넣었던 것은 하고 많은 예의 하나일 뿐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장장 128일 동안 전개됐던 노동자들의 투쟁과 90년 벽두를 장식한 ‘골리앗 파업’의 기억이 생생한 사람들에게 현대그룹의 회장 정주영이라는 이름은 탐욕과 잔인함으로 버무려진 ‘악질 자본가’의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로부터 몇 년 전 삼성그룹의 창업자가 별세한 이후 한국을 상징하는 대재벌이란 ‘왕회장’ 외에는 달리 없었다. 아니할 말로 한국에서 “혁명이 나면 숙청될 빅3 중의 하나”는 농담이 오가는 때였는데 “통일의 할아버지”라니 될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즈음 묘한 드라마 하나가 한국방송(KBS)을 통해 방송된다. 드라마 제목은 <야망의 세월>. 드라마 작가는 나연숙이라는 분이었다. 그 이름이 낯선 분들이 많겠지만 그분이 쓴 드라마 제목 하나만 들면 지금의 40대 중반 이상은 거개가 무릎을 치며 아는 체를 할 것이다. 드라마 <달동네>. 나연숙은 ‘달동네’라는 단어가 한국어 사전에 편입된 계기가 됐고 극 중 아역 탤런트의 이름이었던 ‘똑순이’를 ‘똑똑한 여자’라는 뜻으로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게 만든 국민 드라마의 작가였다.
이 드라마는 한때 6·3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한 인물이 기업체에 입사하고 입지전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주인공의 모델은 다름 아닌 현대건설 사장 이명박이었다. 주인공이 현대건설에 다니니, 자연스럽게 그 극 중에는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을 연상시키는 배역도 있었다. 탤런트 이영후씨가 열연했으며 평안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쓰면서도 성미 급하던 ‘회장님’이 그였다.
재계에서나 알아주던 ‘이명박’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알린 드라마이자, 그 배역을 맡은 후일의 문화부 장관 유인촌과 후일의 명배우 최민식이 연기력을 과시하며 성공을 거두었던 드라마가 막을 내린 직후였다. 1991년 11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을 거친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국세청이 관례와 법규를 뛰어넘어 부당한 과세를 했다”는 이유로 국세청이 추징하겠다고 발표한 1300억원의 세금을 “못 내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 특유의 비음과 혀 짧은 음성으로 “돈이 읎어서 세금 못 내겠습니다”고 야무지게 말하던 그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때 대학가에서는 정주영 회장의 납세 거부 선언(?)을 빗댄 노래가 불렸다.
“개같이 벌으래서 돈만 벌었다. 더러운 돈 좋아해서 갖다 바쳤다. 방위성금 이웃돕기 많이도 냈다. 딱 한 번 밉보이니 천삼백억 세금 때려 열 받아 세금 못내 돈 없어 세금 못내!” 노동자 파업에 노발대발하며
노동조합 탄압에 공들이더니
돈으로 나라를 움직여 보겠다며
대선 출마했으나 처참한 실패
‘야망의 세월’이 ‘노망의 세월’로
끝나는가 싶더니 1998년 6월
그는 소떼를 끌고 북으로 향했다
“이번 방북이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 평화를 이루는 초석 되기를”
‘무료급식’ 공약 내건 정주영 대선 후보 이뿐이 아니었다. 정주영 회장은 벌금을 못 내겠다고 한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80년 국보위 시절 정치권이 임의로 기업을 통폐합하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정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결심”했다는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5억씩 줬다가 20억으로 올렸고,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추석에 20억, 연말에는 30억, 6공화국 들어서는 한번에 50억씩이었다가 90년에는 추석에 50억, 연말에 100억을 줬다”면서 기업가답게 구체적인 수치까지 들이밀며 정치권을 규탄했다. 그러고는 “6공 정부가 망쳐 놓은 경제 위기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나만 편히 살 수 없다”면서 정치 참여를 못박아 버렸다. 아니 참여 정도가 아니라 ‘대통령 선거 출마’의 공식화였다. 재벌 회장이 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의 총재가 되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지금으로서도 될 말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도 있음직한 일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드라마에 빗대 ‘노망의 세월’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던” 이 회장님 앞에서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500원 지폐를 들고 영국은행 물주 앞에서 “우리는 16세기에 철갑선 만든 사람들이오!”를 부르짖던 그 배짱으로, 수십톤 바윗덩어리들도 공깃돌처럼 물살에 쓸려 나가는 바다에서 “유조선을 가라앉혀 물길을 막아라”라고 했던 그 순발력으로 정주영 회장은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그해 봄 치러진 총선에서 수십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수십년 전 외상값까지 다 찾아내는”(코미디언 고 이주일씨의 증언) 정권의 방해도 무릅쓰고서였다. 평소 업무에 소극적인 부하 직원들에게 “해 봤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정주영 회장. 그는 아마 “회장님 왜 이러십니까? 대통령 출마는 안 됩니다”라고 막아서는 이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 출마해 봤어?” 정주영 ‘회장님’이 정주영 ‘의원’을 넘어 정주영 ‘대통령’으로 달려가던 그 몇 달 동안 수많은 말과 사건들이 터져 나왔다. 왕년에 운동깨나 하고 돌과 화염병 장하게 던져 대다가 현대그룹 신입사원이 됐던 사람들이 각자의 캠퍼스로 돌아온 것이다. 그 선배들이 ‘통일국민당’ 입당 원서를 겸연쩍은 얼굴로 내밀고 다닌 것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통일국민당 중앙당사에서 근무하는 당직자의 태반은 현대그룹 임직원들이었다. 물론 다들 회사에 사표는 제출하고 오긴 했다지만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 사표를 믿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정주영 후보의 공약은 지금 떠올려도 혁명적(?)이었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층으로 만들겠다는 기발한 공약도 있었고 아파트를 반값으로 공급하겠다고 약속했고 학생들에 대한 ‘무료급식’ 같은 예언적(?)인 공약도 있었으니까. 여기서 “나는 돈이 많다. 남의 돈 받고 정치 안하고 내 돈으로 하겠다”고 했으니 결국 정주영 회장은 정권 쟁취 과정을 일종의 응찰 과정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정주영 회장의 외도는 참담한 실패와 우스운 해프닝으로 끝난다. 대한민국은 기업인들에게 명절마다 삥을 뜯고, 그러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고, 기업은 기업대로 그렇게 보험을 들어 놓은 뒤 노동자들과 하청업체 후려쳐 돈벌이에 열중하던 정치 후진국이었지만 한 재벌이 자신의 돈으로 정권을 사들이는 것을 간과할 만큼 후진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통일국민당은 마치 도산한 회사처럼 공중분해됐고 정주영을 믿고 정치에 뛰어든 이들은 (이를테면 연세대 김동길 교수 같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버렸다. 정주영 회장은 정치에 뛰어드는 것도 빨랐지만 그로부터 발을 빼는 건 더 전광석화 같았다. 이렇게 그의 말년이 끝났으면 그가 수십년 쌓아올렸던 ‘야망의 세월’은 ‘노망의 세월’로 마무리됐을 것이다. 그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한 대학의 총학생회장 후보가 뇌까린바, “정주영이 통일의 할아버지냐?”는 비아냥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7박8일 방북 연회에서 고른 ‘아침이슬’ 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그가 찾은 곳은 그가 유조선으로 물길을 막고 간척사업을 벌여 만들어냈던 서산농장이었다. 부하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정주영 회장은 15년 동안 매일 새벽 5시에 전화로 ‘영농 현황 보고’를 받고 송아지가 새로 몇 마리나 태어났는지, 논에 물은 충분히 차 있는지를 파악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집착은 홀연히 떠나와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고향 땅에 그 이유가 있었다. “서산농장은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돌밭을 일궈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가며 고생하셨던 내 아버님 인생에 꼭 바치고 싶었던, 이 아들의 때늦은 선물이다.” 어쩌면 그가 선친에게 또 고향 사람들에게 뭔가를 갚고 싶은 마음은 1989년 겨울, 57년 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 싹텄는지도 모른다. 남북의 경제 상황이 역전된 지는 불과 10여년 정도였지만 북한으로서는 최전방 오지에 속할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곧 정주영 회장 고향의 경제적 사정은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자신을 맞이한다고 나일론 옷가지로 추위를 가리며 덜덜 떠느라 이를 부딪치던 친척들에게 옷가지를 내놓은 그는 고향과 이별하면서 숙모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주고 온다. “깨끗하게 빨아서 저기 걸어둬요. 다음에 와서 입게.” 그 약속은 오랫동안 지켜지지 못했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그 색이 바랠 만큼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는 다시 북행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뒤로 대단한 일행이 따랐다. 서산농장에서 애지중지 키운 500마리의 소들과 함께 휴전선을 넘기로 한 것이다. 1998년 6월16일 새벽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들을 대하던 정주영 회장의 육성을 들으며, 어이없게도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청운의 꿈을 안고 아버지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 발음이 새는 그의 목소리가 더 떨려 나왔다. “이제 그때 그 소 1마리가 500마리의 소가 되어 지난 빚을 갚으러 꿈에도 그리던 산천을 찾아갑니다. 이번 방북이 단지 한 개인의 고향 방문을 넘어 남북이 같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그는 탐욕스런 재벌 회장이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의 자식으로 소 판 돈 훔쳐 대처로 나온 두메산골의 청년이었다. ‘돌아가는 탕자’였다. 분단과 가난의 늪에서 함께 허우적거렸던 그 시대의 수천만 한국인 중의 하나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기 소르망이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감탄했던 소떼의 행렬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소 501마리를 더 보내 도합 1001마리가 북으로 갔다. 1000 플러스 하나. 왜였을까. 그건 정주영 회장의 다짐이었다고 한다. 딱 떨어지는 1000에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하는 한 마리를 더 넣음으로써 그 이후로도 계속 지원과 교류가 이어지게 하리라는 다짐이었고 기원이었던 것이다. 또 일부러 새끼를 밴 소들을 집어넣었다고 하니 사실은 1001마리보다 더 많은 소들이 북한 땅에 갔던 셈이다. 그렇게 7박 8일의 방북 기간에 정주영 회장은 다시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만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주영 회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사진 한 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른바 ‘백두혈통’의 절대 권력자였던 그가 기념사진을 찍을 때 중앙의 상석을 정주영 회장에게 양보한 것이다. 아마 유일체제가 구축된 이후 한반도 북반부에서 그 누구도 그만한 예우를 받은 이는 없을 것이다. 방북의 말미를 장식하는 연회에서 북한 측은 정주영 회장 일행에게 노래를 청한다. 이때 정주영 회장 측이 선택한 노래는 다소 의외다. 그것은 ‘아침이슬’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 된다”고 고집불통을 부리던 시절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목메어 불렀을 노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나온 청년이 가난을 딛고 일어서서 돈을 긁어모으면서 “안 돼? 해 봤어?”를 부르짖던 야망의 세월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노발대발하며 그 조직을 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고 돈으로 나라를 움직여 보겠다고 나섰던 노망의 세월을 거쳐,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는 마침내 ‘희망의 세월’을 일구어 낸 것이다. 지금의 남북으로 봐서는 아득해지기까지 한 희망의 세월을 말이다. 1990년대의 10년 동안 정주영만큼 극적인 인물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