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맞이하는 죽음

나나수키 2013. 7. 4. 16:50

매거진esc

“내가 죽으면 제사 지내지 말고 외식해라”

등록 : 2013.07.03 21:19 수정 : 2013.07.0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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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 다잉’을 준비하는 사람들
내 삶의 아름다운 완성을 기획하는 ‘엔딩 노트’
“빈소는 장미로 꾸미고 탱고 틀어달라” 이색 유언 눈길
어느 헤어디자이너는 자신의 장례식때 붉은 장미로 장식해주길 부탁했다.

한 기업가는 자식들에게 제사 대신 음식점에서 외식을 하고 식비는 돌아가면서 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삶에서 마지막 성숙의 기회라는 죽음, 당신은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장례버스 안에서
흘러나온 고인의 목소리
생전에 겪은 멋진 경험과
좋았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며
하객들은 고인과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 60대 남자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려는 조문객들이 서둘러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각자 고인을 추억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5분여나 흘렀을까. 경쾌한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버스 텔레비전 모니터에

고인의 환한 생전 모습이 비쳤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궂은 날씨에 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비록 먼저 다른 곳으로 가지만

사는 내내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이력을 간단하게 소개한 뒤, 생전에 겪은 멋진 경험과 주위 사람들에게 받았던 좋은 영향에 대해서 설명했다.

화장장까지 30여분의 시간 동안 조문객들은 그렇게 고인과 함께 나들이하는 기분을 느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그를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장례일이 어떻게 궂은 날씨임을 알았을까?

알고 보니, 그는 화창한 날씨부터 찌푸린 날씨까지 각각 다른 인사말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케이에스에스해운 창업자 박종규 전 회장은 1998년세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은 최근 줄여 수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5년 전쯤에 있었던 실화다.

실제 이 버스에 직접 탑승했던 학생한테서 일화를 전해 들은 정현채 서울대 의대 내과 교수는 가끔 강의에서 이 얘기를 한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은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획”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는 사람은 홀가분하게 삶의 집착과 미련을 떨칠 수 있고, 남는 사람은 좋은 작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을 공저로 펴냈고 생사학(삶과 죽음에 대한 연구) 강의도 한 바 있는 정 교수는

“고 정기용 건축가의 경우 마지막 떠난 봄나들이에서 가족과 직원들에게 ‘여러분도, 나무도, 바람도, 하늘도, 공기도 모두 고맙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이것 또한 ‘좋은 죽음’의 한 사례”라고 말했다.

 

올해 초 일본의 한 저널리스트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아 죽음을 앞두고 쓴 <내 죽음의 방식: 엔딩 다이어리 500일>이 화제가 됐다.

지난해 요절한 유통 저널리스트 가네코 데쓰오(향년 41)는 병을 알기 직전까지 많은 방송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인생의 황금기인 40대를 맞아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고는 비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번민하다가 자신의 장례식을 기획하고 죽음을 맞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예산을 짰고 “인생의 조기은퇴 제도를 일찍 이용하게 됐다”며 마지막 인사도 준비했다.

그가 남긴 유고이자 임종의 기록은 지난해 말 일본에서 출간된 뒤 10만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고령화 사회인 일본은 임종을 준비하는 ‘슈카쓰’(종활)가 널리 알려져 있다. 2004년부터 다양하게 출시되고 있는 ‘엔딩노트’는

가족의 혼란과 재산 분쟁을 막고 자신의 끝을 평화롭고 존엄하게 맞이하기 위한 과정에 도움을 주는 공책이다.

 

2011년 말엔 일본에서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난 한 샐러리맨 출신 가장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엔딩노트>가 나와 우리나라에도 지난해 상영됐다.

정년퇴직 뒤 여유로운 삶을 꿈꾸던 스나다 도모아키는 건강검진으로 말기암 판정을 받은 뒤 꼼꼼한 성격을 발휘해 자신만의 ‘엔딩노트’를 만들었다.

그는 ‘버킷리스트’로 △평생 믿지 않던 신을 믿어보기 △한번도 찍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손녀들과 재미있게 놀기 등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천주교식 장례를 선택해 죽음을 준비한다. 임종 며칠 전 “컴퓨터를 뒤져봤는데 ‘엔딩노트’ 파일이 없다”고 아들이 말하자

“그럴 줄 알고 백업 파일을 만들어놨지”라고 병상에서 되받아치기도 했다. 임종 직전 “아빠 죽으면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는 딸들에게

“안 가르쳐주지”라고 답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아내를 불러 용서하고 용서받는 둘만의 의식을 치른 뒤 가족들의 사랑 속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2011년 2월 세상을 떠난 헤어디자이너 그레이스 리(향년 79)는

“내 장례식 때 핑크와 빨간 장미로 빈소를 꾸미고 탱고를 틀어 달라”는 얘기를 평소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남겼다.

국내 첫 유학파 헤어디자이너였던 그는 1970년대 국내에 파마머리 대신 단발머리 열풍을 불러일으킨 ‘한국 헤어계 대모’였고

패션지에 요리칼럼을 연재할 정도로 요리 실력이 뛰어난 미식가이기도 했다. 지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레이스 리는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나 죽으면 장례식장에 하얀 꽃 꽂고 질질 울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핑크와 빨강 장미꽃으로 장식해줘. 올 때는 제일 멋진 옷을 입고 예쁘게 꾸며서 와.

제사는 말고 내 생일날 집에 다들 모여 맛있는 음식 차려놓고 와인 한잔 마시면서 지내. 탱고를 춰준다면 얼마나 멋있겠니.”

그의 수제자인 이희 원장(이희 헤어 앤 메이크업)은 “선생님의 당부대로 장례식은 아름다운 분위기 속에 진행했으며 주위에서 구경을 왔을 정도”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제자들은 탐스러운 분홍과 빨간 장미꽃으로 영정 주변을 장식했으며 재즈풍의 찬송가를 틀었다.

딸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자신이 가진 옷 중 가장 멋있는 옷을 입고 왔다.

지금도 그의 제자들과 자녀들은 그의 생일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고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눈다.

이 원장은 “선생님은 평소 ‘누구나 태어나면 한번은 다 가는 것이고, 제 살 것을 다 살고 가니 억울할 것도 없으며

다만 오늘을 성실하고 멋있게 살면 그뿐’이라고 언제나 말씀하셨다.

우리에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스승이자 멘토였고, 진정한 문화예술인이었다”며 고인을 추억했다.

 

케이에스에스(KSS)해운의 창업자 박종규(78) 전 회장(현 고문)은 1998년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는 가족한테 남기는 유언장에서 “내가 행복하게 산 것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컸기 때문이다. 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내 몸 하나 바치는 것은 아깝지 않다”며 장기 기증을 하고 남은 유골은 해양장을 해 달라고 밝혔다.

또 “어느 집이나 며느리 되는 사람의 노고가 너무 크다”며 제사를 지내지 않도록 하고, 기일 아침 각자 집에서 사진과 꽃 한송이를 두고 묵념추도만 하라고

당부했다. 단 “저녁에 음식점에 모여 형제간의 우의를 다지는 기회로 삼아라. 식비는 돌아가면서 내도록 하여라”라고 촘촘하게 덧붙였다.

은퇴 뒤 제주도에서 생활하고 있는 박 전 회장은 <한겨레> 이메일 인터뷰에서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내가 평소 생각했던 것을 미리 아이들에게 명시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고, 바다사업(해운업)의 직업인으로서

해양정신을 고취하는 것도 물을 멀리하는 우리 사회에 진취적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해양장 선택의 이유를 밝혔다.

또 “없어질 육신에 너무 애착을 갖는 것보다 정신으로 유산을 남기는 것이 후손에게 공헌하는 일일 것이며, 사람 사는 데 필요한 토지도 모자라는데

죽은 사람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큰 폐가 될 것이므로 수목장을 권한다”고 했다.

박 전 회장은 평소 평생 모은 재산을 회사 사주조합과 사회단체, 그리고 가족들에게 3등분 해 나누겠다고 밝혀온 바 있다.

그는 “세 아이들도 이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아버지가 번 돈은 아버지가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아이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국죽음학회는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존엄하게 맞이해야 할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길, 이 길을 스스로 준비하는 것은 남은 가족들뿐 아니라 생을 뜻깊게 보내기 위한 당연한 일이라는

인식이 늘고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