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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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상여에 실려 마을 친구 김아무개씨의 선소리를 좇아 수목원 구석구석을 밟고는 세상을 떴다.
가련한 사람! 열아홉 눈부신 나이에 벗이라곤 술·담배·수면제·파운데이션·녹차 그리고 묵주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지은 별호가 육우당.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성노동자·장애인·이방인을 더 감싸고 사랑했던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했지만, 교회는 앞장서 그에게 돌을 던졌다.
지옥 불에 던져질 죄인! 한번쯤 마음껏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노래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어디에도 그가 머리 둘 곳을 내주지 않았다.
육우당이 자살하기 꼭 1년 전,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원장은 꽃상여에 실려 마을 친구 김아무개씨의 선소리를 좇아 수목원 구석구석을 밟고는 세상을 떴다.생전 원예인으로서는 최고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작고한 뒤엔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 동판 초상이 헌정됐다. 전당에 헌정된 사람은 단 5명뿐.
원예계의 노벨상이라는 영국 왕립원예협회의 비치 메달도 수상했고, 미국 프리덤 재단이 주는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 실현에 헌신한 공로로 메달을 받기도 했다.
복 받은 인생! 그를 깊이 아는 이들에게 그의 삶은 그렇게 복되지 않았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육우당처럼 담배·술·브리지를 평생 반려로 삼았다.
평생 응석 부리던 어머니 나라를 떠나 한국으로 귀화했고, 어머니와 가족이 독실하게 믿었던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평소 하루에 담배 3갑을 태웠고,
집에 혼자 있을 땐 소주 1~2병을 마셔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브리지 또한 중독성이 있는 게임이었다.
물론 거기에 자신을 내맡길 정도로 약하진 않았다. 비록 말 못할 사연을 가슴 깊이 담고 살았지만, 이웃과 세상에 대한 사랑은 너무 컸다.네 명의 양자가 모두 그 곁을 떠나고, 한때 절친했던 벗들도 그를 멀리했지만, 그는 원망하거나 냉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이들이 사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따듯한 곳으로 가꾸는 데 제 인생을 바쳤다. 그리하여 트럭도 들어갈 수 없었던 궁벽한 천리포 해안 황무지를 국제수목학회가 지정한
아시아 첫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일궈 세상에 선물했다.
민 원장이 이른바 ‘커밍아웃’을 한 것은 72살인 1993년. 그의 가족들은 눈치채긴 했지만, 그가 ‘나는 여자보다 남자가 좋다’고 고백한 것은 일흔이 넘어서였다.
많은 이들이 이미 그의 곁을 떠나고 나서였다. 식목일이 가까워 오면 기자들이 몰려왔다. 1980년대부터 유명해진 수목원 때문이었다.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빼놓지 않았다. 하나는 수목원 조성과 운영에 드는 그 많은 경비를 어떻게 조달했는지였고, 다른 하나는 왜 결혼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자연의 소중함을 더 알리기 위해 인터뷰엔 적극 응한다는 원칙이었지만, 그의 삶에 간섭하는 두번째 질문 때문에 가끔은 주저했다.
수목원 비용은 1990년대에도 한 해 운영비만 15억 정도가 들었으니 당연한 관심사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은행 고위층으로 지냈으며, 1960년부터는 증권가의 큰손혹은 투자의 귀재였던 그의 명성으로 쉽게 설명이 됐다. 그의 독신도 관심사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그는 서울의 사교계에서 명사였다.
1960년대 이미 당시 톱스타였던 문정숙씨의 파트너로 영화에 출연했으며, 문씨와의 염문이 돌기도 했다. 그에겐 평생 그를 연모했던 대학동창 캐서린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여성도 그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가 내놓은 답은 매번 ‘나는 나무와 결혼했다’였다.
한마디로 잡아떼니 짓궂은 기자라도 더 묻기 어려웠다.
반쯤 커밍아웃 한 뒤 한 직원이 회식 자리에서 물었다. “동성애자라는데 사실인가요?” 묻기도 답하기도 어려운 이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에게 프러포즈하는 건가? 자네는 내 파트너가 되기엔 너무 어려.” 재치있는 답변 같지만, 오히려 슬픔과 고통이 짙은 말이었다.
‘동성애도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하나’인데, 그것을 마치 범죄 혐의라도 추궁하듯이 확인하려 드는 사람들의 태도가 힘들었다. 변명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지만,
그런 대화 속에서 매번 마음을 다쳤다. 그가 한국의 불교 문화에 깊이 빠졌던 것도 실은 그 자연과 인간 삶에 대한 관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국인은 (동성애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지독한 외로움은 천리포 수목원을 일구는 동력이었다. “내가 결혼했으면 어떻게 수목원을 가꿀 수 있었을까.” 누구도 반문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마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면, 애초 그가 생각했던 작은 농원이 딸린 별장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아니 아예 귀화도 안 했을 것이다.
“나는 호랑가시나무와 결혼해 목련을 낳았지”라는 그의 공식적인 답변은 더도 덜도 아닌 진실이었다.
천리포 수목원을 세계에 알린 나무가 호랑가시와 목련이었다. 완도호랑가시나무는 그가 세계의 학계에 처음 알린 나무였고, 수목원이 보유한 목련 416종은세계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외국에서 가져온 씨앗에서 얻은 어린 나무 한 그루가 꽃을 피우기까지 26년을 기다리기도 했던 헌신의 결실이었다.
그런 헌신 끝에 그는 자신의 꿈대로 나무의 천국을 조성했다. 하지만 그의 고독은 어쩔 수 없었다.
수양딸 안선주 원불교 교무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원장님 얼굴엔 쓸쓸한 그늘이 짙었죠. 오랜 독신 생활 때문이려니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탓이 컸어요.” 양아들 넷은 장성하자 모두 그 곁을 떠났고, 일부는 재산에나 관심을 보였다.
아들처럼 사랑했던 젊은이가 몇몇 더 있었지만 남아 있는 이는 별로 없다. 그가 극진히 사랑했던 손자 정, 근도 떠났다.
수목원이 키운 인재들도 유학 가면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다. 생전 벗을 자처했던 이들이 그렇게 많았지만, 정작 그의 장례식에 찾아온 이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사귀었다’는 오해가 두려워서였을까. 늙어갈수록 나무에 더 깊이 빠진 데에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1999년 한미우호상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무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나무는 항상 하늘을 우러러 솟으며 생명력이 넘친다.
모든 사람이 나무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일흔에 사귄 벗 임 선생에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동안 나무를 심기 위해 수목원 경내의 수많은 묘지를
얼마나 파헤쳤는데…. 죽으면 화장해서 나무뿌리 근처에 뿌려졌으면 해요.” 수목장 개념도 없을 때였다.
상처받은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위로를 찾곤 했다. 말년 원불교에 귀의해 임산이란 법명도 얻었다. 수목원 안 숙소 후박집 대청엔 이런 액자가 걸려 있다.원불교 법전에서 따온 내용이다.
“임께서 내 마음 모르신들 어떠하며, 벗들이 내 세정 안 돌보면 어떠하리, 깊은 산 향 풀도 제 스스로 꽃다웁고, 삼경 밤 뜬 달도 제멋대로 밝삽거늘 하물며, 군자가 도덕사업 하여 갈 제 세상의 알고 모름 그 무슨 상관이랴”많은 육우당 같은 이들은 차별과 모멸을 이기지 못한다. 지금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와 같이 이들의 슬픈 별이 되곤 한다.
민 원장은 그들과 달리 지상에서의 눈물로, 목련 416종과 호랑가시나무 350여종, 동백 300여종 등 1만1000여가지 수종을 키워냈다.
차별받는 이는 물론 차별하는 이에게도 그 빛과 온기를 나누고,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는 별들이었다. 멀어질수록 그 향기 더욱 그윽한 사람이다.
*향원익청(香遠益淸)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지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동성애, 같은 지향 다른 세 길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개정을 권고했다. 유해매체 심의 기준에 ‘동성애 조장 우려’가 포함된 게 문제였다.
그러자 한기총 등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한다’며 아우성쳤다. 한기총이 성명을 발표하고 20일 뒤, 19살의 한 젊은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보통 사람은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을 가지만 나는 단지 ‘인적 드문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2007년 정부는 다시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했다. 성적 지향, 정치적 지향, 사상, 학력, 병력, 출신 국가 등 7개항에 따른 차별을 금하는 내용의 법안이었다.2010년에도 국회에서 다시 입법을 논의했다. 하지만 모두 눈치만 보다가 법안은 폐기됐다.
올해 2월 정부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법 제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김한길·최원식 의원 등은 3건의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두 의원은 상정도 하지 않고 철회했다. 누리집(홈페이지)에 10만여건의 반대 글이 오르고, 매일 수백통의 전화가 사무실 업무를 마비시키자 두 손을 들었다.
이번엔 영화감독 김조광수씨가 18살 연하남과 결혼 계획을 발표했다. 육우당은 절망 끝에 10년 전 스스로 삶을 마감했지만, 김조 감독은 싸움의 길을 택한 것이다.다름을 비정상 범죄시하는 우리 사회 다수자들의 횡포, 종교의 독선과 정면 대결하겠다는 것이다. 양단의 선택을 오가는 게 오늘의 현실.
그 선택 속에서 애틋하게 그리워지는 이가 있다. 세상의 차별에 기죽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투사처럼 맞서지도 않은 이였다.대신 그런 사람들에게 지상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선물로 안겨주었다. 두번째 귀화인이자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았고,
우리 문화와 풍물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민병갈 원장이다. 그가 일생을 바쳐 일군 천리포 수목원엔 이제 연간 시민 30만여명이 찾아와 안식을 얻고 간다.
그의 수목원은 세상 어느 누구도 가리지 않는다.
도움말을 주신 <나무야, 미안해>(민 원장 전기) 저자 임준수 선생과 30여년 청춘을 수목원에 바친 정문영 부원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