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無碍의 자유인 / 종림스님

나나수키 2013. 4. 25. 11:11

술 담배 만화…부처님도 빙그레

[하늘이 감춘 땅] 텅 비워 꽉 찬 종림스님


식당 앉자마자 한 대 꺼내물고 맥주까지 ‘캬~’

밤새 읽어 머리 비우게 한 만화가 산더미처럼


지리산 9부능선에 자리해 천왕봉부터 노고단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금대의 전경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툭 터집니다.

그래서 지리산인들은 옛부터 금대를 동양제일의 명당이라고 손꼽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금대에 오를 때는 이미 어두워진 뒤였습니다. 지리산 파노라마를 조망할 시간을 놓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엔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루밤 자고 나서 조망할 수도 있겠거니와 금대에선 누군가가 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름다울수록 허전했던 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그리고 그리워한다는 것, 설렌다는 것…. 그것이 금대에 오르는 마음이었습니다.

5년 전 1년간 신문사를 쉬고 히말라야와 인도 오지를 들짐승처럼 휩쓸고 다닐 때였습니다.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보기 위해 어렵게 결행한 순례였습니다. ‘귀찮고 소란한 모든 것’을 놓고, 버리고,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굳이 홀로 다녔습니다. 제 앞엔 설산의 선경이 펼쳐져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까요.

내 앞에 샹그릴라 같은 아름다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당에 있으면 있을수록 가슴 속은 더욱 더 허전해졌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나눌 그 누구 하나 없다는 것이 그토록 아쉽고 안타까울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안주 없는 깡소주라도 까면서 누군가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면 그렇게 아쉬울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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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림스님


가파른 산길을 달려 20~30분 가량을 오르니, 어둠 속의 금대에서 종림 스님의 하얀 이만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님을 처음 본 것은 6~7년 전쯤입니다. 서울 조계사에서 ‘간화선 토론회’가 열렸는데,

토론회가 끝난 직후 토론자로 그와 도법 스님을 비롯한 10여명이 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미처 못다한 토론을 이어가기 위해서였지요. 그곳엔 스님들뿐 아니라 수십명의 방청객과 기자들까지 대거 함께했습니다.

스님들만이 아니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대중들이 함께한 야단법석이 펼쳐진 것이지요.


대중들과 함께한 야단법석 자리서도 시선 아랑곳 없이


그런데 종림 스님이 자리에 앉자마자 허리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대중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맥주까지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켰습니다.

스님들 중엔 곡차를 즐기고,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대중들의 안목이란 겉모습 하나만으로 사람 전체를 재단하는 겉볼안인 때가 많은지라

알 만한 사람들끼리의 자리가 아닌 대중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굳이 책잡힐 짓을 하지 않는 게 상식이겠지요.

그래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느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게 당연지사가 된 세상에서 대중의 눈치에 아랑곳없이

담배를 물고 털끝만한 꺼림이 없이 할 얘기를 해가는 모습이 오히려 한줄기 청풍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가 바로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잠자던 고려대장경을 컴퓨터 이용자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한

고려대장경 연구소장이었습니다.

그의 겉모습에선 새털 만큼의 무게도 찾아볼 수 없지만 실은 1980년대부터 한국 불교계를 정화하려던 개혁 세력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그만큼 나름의 불교관과 철학관을 가진 것을 개혁세력들이 인정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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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보다 군기가 세다는 해인사서도 못말려


하지만 그는 겉모습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해병대보다 군기가 세다는 해인사에서도 그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그를 아끼는 도반들이 “남 있는 곳에서 담배 좀 안 피울 수 없느냐”고 하면,

 

“큰스님이나 주지는 느그들이나 하고, 나는 그런 거 할 생각 없으니, 담배 피우는 건 내버려 달라”

 

며 태평스레 담배를 물곤 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는 방엔 언제나 밤새 읽어 머리를 깨끗이 비우게 한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곤 했습니다.

술, 담배, 커피, 만화…. 스님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것만을 접하곤 했지만,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

그와 함께 살면서 연구했던 재가자들 가운데 무려 7명이 머리를 깎아 출가를 결행했습니다.

그에게 알 수 없는 특별한 뭔가를 느꼈겠지요.


승복도 걸치지 않은 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니나다를까. 종림 스님은 승복도 걸치지않은 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반겼습니다.

금대의 회주인 스님의 방은 법당과는 떨어져 계단을 올라간 외진 곳의 별채였습니다. 그 별채야말로 지리산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별채에 앉아 우리는 종교를 얘기하고, 철학을 얘기하고, 삶을 얘기했습니다.

주로 선방을 돌았던 어느 중진 스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종림 스님 아는 것 100분의 1만 알아도 한국 불교를 확 바꿔놓을텐데….” 그러나 종림 스님은 뭔가를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묻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라 그냥 같은 눈높이에 서서 격의 없이 얘기 할 뿐입니다. 뭔가를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꽃은 필 수도 있고, 안 필 수도 있어. 안 피면 할 수 없는기라. 피면 피는대로 지면 지는대로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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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눈길로 “기둥보다 사이사이 공간 메워주기나 하면 되는거지”


그 무욕이 눈이 허공을 응시했습니다. 바로 그가 바라보는 허공처럼 그 눈동자도 텅 비어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주류에 설려고 한다. 내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할까. 서면 서는대로, 밀리면 밀리는대로 살면 된다.

나는 기둥보다는 사이 사이 공간을 메워주기나 하면 되는거지.”


아마도 그가 국가적 프로젝트로로 진행해야 할 고려대장경 디지털화 작업을 하면서도 ‘대책’도 없고, ‘욕망’도 없었기에

오히려 그 일이 가능했는지 모릅니다.

한국 선가에서 가장 존경받으면서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않은 송담선사까지도 그를 도와주었으니 말이지요.


선가에 최고 윗길인 송담선사 “내가 보기에는 삼장법사의 후신”


송담선사는 평소엔 은둔하다가 한두달에 한번씩 인천 용화선원에 와서 법문을 하는데,

평소에 신도들에게 돈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으신 분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종림 스님을 불러다 대중들 앞에 세워놓고

“내가 숙명통은 못해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보기에 종림 스님은 삼장법사의 후신이요. 그를 도와 대장경이 세상에 널리 읽히도록 합시다”고 해서

수많은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 고려대장경 디지털화에 큰 힘이 될 수 있었지요.

그가 금대의 회주로 있는 것도 금대가 그의 본찰인 해인사의 말사이기도 하지만,

누구라도 동양제일의 명당엔 욕망가가 아닌 무욕인이 앉아야 할 것임을 아는 때문이겠지요.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인데도 고목처럼 앉자 수행


금대는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년) 행호 조사에 의해 창건돼 많은 수행자들이 정진했던 곳이지요.

그 가운데 보조 지눌의 법맥을 이은 제자인 진각 혜심이 금대에 앉아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가 되었는데도 우뚝하게 앉아

마치 고목처럼 움직이지 않고 정신이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육체를 잊어버린채 수행했다고 전합니다.


대울타리 띳집은 시냇가 따라 비켜 있고

봄 찾아든 산촌에는 곳곳마다 꽃 피었네

무상 태평이 도리어 유상(有像)이니

외롭게 연기 이는 곳이 바로 인가로다.


그토록 처절한 수행자인 진각 혜심의 시구에서도 ‘불도(佛道)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유상함이 바로 무상한 불법의 현현임’을 말해주고 있네요.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 거대한 산이 아니라 인가 한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나희덕시인의 <산속에서>도 이런 인정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구나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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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 나한전


시종일관 꼭 잡고 있던 그 손이 바로 천하 명당


밤이 깊어지고 새벽달도 어스름해질 무렵 저는 종림 스님과 함께 아예 별채 밖으로 나와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 감추어둔 얘기까지 아낌 없이 털어놓으며 때론 한 숨 짓고, 때론 연꽃 같은 울음과 웃음까지 새벽 하늘에 쏟아냈습니다.


종림 스님은 시종일관 제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새벽 공기는 찼지만 종림 스님이 꼭 잡은 손을 통해 전해오는 그 마음이 우주를 따사로운 햇살로 채웠습니다.

저는 추위도 잊고, 그곳이 동양제일의 명당인 것도 잊었습니다.

그 따사로운 손만큼 좋은 명당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었습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