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어디 한번 산책을 시작해보실까. 광화문 동십자각에서 삼청터널로 이어지는 길로 접어들어 경복궁 담을 끼고 걷는다.
건너편 아담한 화랑들과 국립현대미술관 공사 현장을 지나면 유명한 칼국숫집이 나오고,
그 길은 100여년 역사를 가진 재동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걷다 보면 아트선재박물관과 정독도서관이 만나는 화동 고갯길에 오르게 된다.
조선조 때 꽃을 길러 궁에 공급했다 하여 화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겸재 선생께서 인왕산도를 그렸다는 말도 전해온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카페와 옷가게, 그리고
작은 식당들이 늘어선 골목과 만나는 교차로에 들어서면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길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쯤에선 보행인이건 운전자건 모두가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가야 한다. 신호등 같은 건 없다.
모두가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며 천천히 가기 때문에 이곳은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느낌을 준다. 길가 야외카페에 앉아 있어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모두가 배려하며 건너는 건널목은 사람의 속도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을 확보해준다.
최근 이곳 주민들에게 화동 고갯길을 깎기로 했다는 공문이 날아왔다고 한다.
관광객이 늘어나니 말쑥하게 도로 정비를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북촌을 가장 북촌답게 만드는 고갯길을 깎겠다니 황당한 발상 아닌가?
그리고 고갯길 위에 사는 주민들은 사다리를 타고 집에 들어가란 말인가? 한때 모든 것을 밀어버린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것, 깔끔한 것, 직선인 것만 좋다면서 헌것, 지저분해 보이는 것, 곡선인 것을 마구 밀어버린 때가 있었다.
고향 마을을 미련 없이 떠났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달동네를 창피해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예언컨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국가의 첨단 도시 서울에서 도시계획의 일환이라며 고갯길을 밀어버린다면, 바로 그 황당함의 극치로
그곳은 악명 높은 장소가 될 것이다.
서울시민들은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잃어간다며 작고 오래된 것, 정겨운 것, 시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북촌의 ‘불편’한 곡선길이 바로 그런 숨쉴 곳을 선물하는 장소 중 하나다. 우리가 아끼고 보존해야 할 것은 수백년 된 국보들만이 아니다.
모든 걸 휘발시켜버릴 듯 초고속으로 달리는 롤러코스터에서 잠시라도 내려 쉴 수 있는 장소를 남겨둬야 한다.
풀 한 포기 뽑지 않고 돌멩이 하나 건드리지 않고 시간을 머금고 남아 있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의 리듬과 기억이 묻어 있는 사색의 장소,
만남의 장소가 필요하다. 시민들이 사대문 안 산책을 즐기는 이유가 여기 있고, 서울 청년들의 로망이 그런 곳에 카페를 내는 것인 이유도 거기 있다.
주민들이 화동 고갯길 깎기 반대 운동을 시작했고, 산책길이 사라지길 원하지 않는 나도 당연히 동참했다.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는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갈 때 유대인이 아니어서 침묵했고,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당원이 아니라서 침묵하고,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조합원이 아니어서 모른 척했는데 그들이 막상 문 앞에 들이닥쳤을 때
자기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는 시를 남긴 분이다.
지난주에 산업통상자원부가 2024년까지 원자력발전소를 11개를 더 짓겠다고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했다고 한다.
‘살림’의 국정을 펼쳐야 할 마당에 죽임의 토건사업을 계속하겠다니 이 또한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시간의 리듬, 삶의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시민들에게 북촌 고갯길 산책을 권하고 싶다.광화문 인디스페이스에 들러 미학과 정치학을 절묘하게 연결시킨 지율 스님의 영화 <모래가 흐르는 강>을 관람하면서 고즈넉한 밤을 보내셔도 좋을 것이다.
고갯길을 보존하는 것이 곧 모래강을 살리는 일이고, 모래강을 살리는 일이 곧 내가 숨쉬는 길이다. 나를 제대로 돌보기 시작하자.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