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죽비

[스크랩] ▶▶일어나 맨눈으로.. 이 詩를 읽네요 <겨울공화국>

나나수키 2012. 12. 23. 22:35

 

겨울공화국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뻐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 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 두고
언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 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 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 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 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약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온몸을 버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 박정희 유신시대에 시인 양성우는 이 시를 쓰고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

* 지금 다시 우린 19일 밤부터 겨울공화국에 성큼 들어서 있다.

출처 : 경제
글쓴이 : 저낮은곳 원글보기
메모 :